아프간 정부군이 7일(현지시각) 칸다하르 지역에서 탈레반의 자살 폭탄테러로 최소 33명이 죽은 정부기관 건물을 둘러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미군이 사라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공격 문자 메시지만으로도 정부군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LA타임스가 7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마치 베트남전에서 남베트남이 무너졌던 것처럼, 부패한 아프간 정부 관리들은 미군이 남겨놓은 자산을 빼돌리며 팔아먹고 있고 정부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A타임스에 따르면 탈레반은 지난 10월말 자신들이 1994년 처음 결성됐던 칸다하르주의 상사르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사흘간의 전투끝에 탄약이 모두 떨어진 아프간 정부 경찰관 6명을 사살했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재점령하면서, 아프간 복귀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LA타임스는 “이런 일은 상사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미군의 빈자리를 탈레반이 급격히 메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2001년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후 미군은 한때 약 10만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그러나 “끝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지난 2016년 당선 후, 올해 현재 약 4500명의 미군만 남아있다. 트럼프는 이마저도 자신의 퇴임 직전까지 2000명 수준으로 줄이라고 명령한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월 탈레반과 내년 6월까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수도 있다는 평화협정을 맺기도 했다.

지난 2017년 8월 미군 병사가 헬기 뒤에 앉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지역을 내려다 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군이 주둔했던 칸다하르 비행장은 한때 미국의 패밀리 레스토랑 TGI 프라이데이와 도넛 가게가 있었지만, 현재는 수백명의 미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수도 카불 주변의 스콜피언 기지는 미군 특수부대의 본거지로 이용됐지만, 지난 9월에 특수부대가 철수한 뒤 아프간 정부군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지에 남겨져 있던 트럭과 다른 차량들은 미군이 철수한 뒤 며칠만에 모두 사라졌다. 아프간 정부의 부패로 인해 팔려나갔거나 도난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LA타임스는 아프간 관리를 인용해 보도했다.

수도 카불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와닥 지역에선 약 6개의 경찰과 군기지가 최근 몇 달 사이 탈레반에게 빼앗겼다. 카불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의 주요 지점들을 탈레반이 점령한 것이다. LA타임스는 지역 경찰 사령관을 인용해 몇 개 기지는 싸우지도 않고 탈레반 손에 떨어졌다고 했다. 탈레반 지휘관들이 정부군에 공격이 임박했다고 문자를 보내자, 겁을 먹은 정부군 병사들이 이탈했다는 것이다. 아프간 경찰 지휘관인 사르다 왈리는 “(아프간의) 다른 지역에서 온 병사들은 탈레반이 위협하면 항복한다”고 했다. 부족주의가 강한 아프간에서 병사들이 굳이 자신들의 고향도 아닌 곳을 탈레반으로부터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5월 아프간 감옥에서 포로 교환을 위해 풀려나는 탈레반 병사들 /EPA 연합뉴스

탈레반의 사기는 높아만 가고 있다. 상가르 지역의 탈레반 지휘관인 라피울라 하카니는 “탈레반이 미국을 이겼다”며 “우리의 승리”라고 말했다. 상가르의 주민들도 아프간의 지배에 적응해가고 있다. 탈레반은 지역 주민들에게 집 안에 머물라고 명령을 내린 뒤 거리에 지뢰를 심었다. 아프간 정부군이 헬기와 군대를 동원해 반격해 왔을 때, 탈레반 무기를 인근 옥수수밭에 숨겨놓고 자신들이 마치 농부인 것처럼 위장해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미 싱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의 추산에 따르면 아프간 정부는 아프간의 약 30%를 관할하고 있고, 탈레반은 약 20%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프간 영토의 50%에선 정부군과 탈레반이 주도권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탈레반이 미군의 빈자리를 채우고 정부군을 압도하기 시작하면 탈레반 점령지역이 순식간에 정부군을 넘어설 수도 있다.

지난 2001년 이후 미군은 아프간에서 2400명이 죽었고, 미 브라운대 추산에 따르면 작년까지 전쟁 비용으로만 약 1조달러(1086조원)을 썼지만 탈레반의 복귀를 막지 못했다.아프간 재건과 정부군 지원을 위해 지원된 돈만 약 1410억 달러(153조원)에 달한다. 익명을 요구한 아프간의 고위 장교는 LA타임스에 “(미국의 지원으로) 미국인들의 우리(아프간인)의 삶을 매우 쉽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미군 철수로) 우리의 책임이 됐다”며 “(현재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