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건을 부른 트럼프 전 대통령만큼이나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인물이 있다. 트럼프의 대선 불복 소송을 주도했던 루돌프 줄리아니(76) 변호사다. 지난 20~30년간 국민적 영웅으로 인기를 누렸던 그의 말년은 거의 ‘추락’에 가깝다.
그는 최근 미 전자개표기 회사 도미니언으로부터 13억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그는 11월 대선 이후 “도미니언 개표기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권이 만든 좌파의 개표 조작기로, 트럼프를 찍은 수백만 표가 조 바이든 표로 바뀌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게 사실이 아니니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이다.
앞서 줄리아니는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뉴욕변호사협회에서 제명당했고, 소셜미디어 계정도 차단됐다. 또 코미디 영화 ‘보랏2’에서 여배우의 몰래카메라에 넘어가 호텔 침대에 드러누워 논란을 빚었고, 대선 불복 회견에서 땀과 함께 검은 염색약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줄리아니는 트럼프 변호나 극우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이를 활용해 돈벌이를 하는 일에도 나서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지난 연말 대선 불복 소송을 주도하는 한편, 부유층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트럼프 퇴임 전 사면을 받게 해주겠다”며 수만달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은 개인 유튜브 채널이나 뉴욕 라디오 방송 등에서 트럼프 지지자 수십만 명을 상대로 한 광고 돈벌이에 나섰다. 줄리아니는 도미니언 개표기를 비난하다가 갑자기 ’596달러짜리 사이버 해킹 방지 시스템'을 소개하고, “요즘같이 불확실한 시대엔 금이 최고”라며 금 주화를 판매하기도 했다. 정체 불명의 관절염 영양제 ‘오메가 XL’을 사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할인 코드도 알려준다.
그는 ’2001년 9·11 테러의 영웅'으로 미국인들에게 각인됐던 인물이다.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그는 테러 현장에서 눈물을 삼키며 단합을 강조하고 수습을 진두지휘해 진보 진영으로부터도 “미국의 시장”(오프라 윈프리)이란 찬사를 들었다. 그 공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기사 작위도 받았다.
9·11 테러 전에는 빈곤과 범죄로 들끓던 뉴욕시를 환골탈태시킨 ‘법질서 시장’으로 존경받았다. 1980년대엔 뉴욕 남부지검 검사장으로 마피아 조직을 대거 검거, 이곳을 미 최고의 검찰 조직으로 만들었다. 줄리아니는 당시 강력범들을 소환할 때 TV 카메라 앞에 세워, ‘범죄자 포토라인(perp walk)의 특허권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시장 퇴임 후에도 강연·집필과 로펌 설립으로 수억달러를 벌었지만, 2004·2008년 두 차례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며 정치 무대로 다시 나왔다. 공화당에 지지 기반이 없던 트럼프에게 줄리아니는 큰 도움이 됐다. 뉴욕의 정·재계 거물인 두 사람은 가족끼리 골프 모임을 할 정도로 친했다.
줄리아니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에게 국무장관이나 법무장관직을 줄 것으로 여겼지만, 트럼프는 야심이 큰 그에게 그런 자리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법률 대응을 맡겼다. 하지만 둘의 결합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2019년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당시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였던 조 바이든 부자(父子)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줄리아니는 바이든 부자의 비리를 캐겠다며 직접 우크라이나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별 소득이 없었고, 트럼프는 이 스캔들로 인해 결국 탄핵소추됐다. 줄리아니 본인도 우크라이나에서의 뇌물 수수와 돈세탁, 미 외교관 방해 혐의로 친정인 뉴욕 남부지검에서 수사를 받았다.
이어 줄리아니가 주도한 대선 불복 운동 역시 결과적으로 트럼프에게 2차 탄핵까지 안겼다. 트럼프는 줄리아니가 청구한 하루 2만달러의 수임료와 출장 경비를 주지 않겠다며 분노하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이번 탄핵 대응팀에선 그를 배제하기로 했다. 둘의 관계도 파탄 난 것이다. 줄리아니 밑에서 일했던 검사 출신들 사이에선 “어떻게 그가 트럼프 정권에서 이렇게까지 됐느냐”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뉴욕타임스 등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