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지하철에서 아시아인 남성이 흑인 남성에게 폭행 당하는 영상이 29일 미국 CBS 방송에 보도됐다./CBS캡처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아시아계에 대한 무차별 증오 폭행이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한인 사회 등 아시아계가 느끼는 공포는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주로 흑인들이 증오 범죄를 저지르면서 같은 소수 유색인종인 흑인과 아시안의 갈등도 부각되는 양상이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낮, 뉴욕 맨해튼 중심가 타임스스퀘어 인근에서 65세의 필리핀계 여성이 거구의 흑인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흑인은 여성을 갑자기 발로 걷어차 쓰러뜨린 뒤 얼굴을 서너 차례 차고 짓밟았다. 그러곤 욕설과 함께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냐”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틀 뒤 체포된 이 흑인은 어머니를 살해한 전력으로 보호관찰을 받아온 인물이라고 경찰은 전했다.

미국 뉴욕 시내 한복판에서 거구의 흑인 남성이 작은 체구의 아시아계 여성을 마구 짓밟는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뉴욕경찰(NYPD) 증오범죄 전담팀과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29일(현지 시각) 오전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건물 앞에서 흑인 남성이 마주 보며 걸어오던 65세 아시아계 여성을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강하게 걷어찼다고 밝혔다. 사진은 용의자 남성. /뉴욕 경찰 트위터

지난달 29일 맨해튼 지하철 J노선 객실에서 흑인 남자가 인도네시아계 유학생으로 알려진 남성을 주먹으로 여러 차례 가격하고 목 졸라 기절하게 한 동영상이 공개됐다. 지난달 17일 텍사스 휴스턴에선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미용용품점에 흑인 여성 5명이 몰려와 “빌어먹을 중국인”이라며 집기를 부수고 아내 김모씨를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폭행했다.

미 전역에선 지난달 16일 21세 백인 청년의 총격으로 한인 여성 4명 등 8명이 숨진 애틀랜타 사건 이후 희생자 추모와 증오 범죄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증오 폭행이 벌어지면서 아시아계들이 느끼는 공포의 강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뉴욕 폭행 동영상을 본 한인들은 “길거리 다니기도, 대중교통 타기도 겁난다” “총이라도 사야겠다”고 말하고 있다.

때리고… 짓밟고… 목조르고… - 최근 미국 곳곳에서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왼쪽 사진은 지난달 17일(현지 시각) 텍사스주 휴스턴의 한인 미용용품점에서 흑인 여성들이 여성 주인 김모씨를 때리는 모습. 가운데 사진은 29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인근에서 거구의 흑인 남성이 필리핀계 여성을 발로 폭행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은 29일 뉴욕 경찰이 공개한 영상으로, 흑인 남성이 지하철 객실 안에서 인도네시아계 유학생으로 알려진 남성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다.

지난해 미국에선 흑인이 백인 경찰 무릎에 짓눌려 사망한 사건으로 이른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 인종차별을 당해온 흑인들이 아시아계를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선 그들이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그 분노를 다른 소수 집단에 전가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코로나 사태로 미국 사회에선 흑인들이 가장 많이 직장을 잃었고, 코로나로 사망하는 비율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27일 뉴욕 플러싱 차이나타운에서 열린 아시아계 증오 범죄 규탄 시위. /신화통신 연합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증오 범죄의 주범이 흑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올 초 미 형사법 저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1992~2014년 아시아계 상대 증오 범죄 가해자의 75%는 백인이었다. 최근 증오 범죄 용의자들도 흑백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미 인종 문제는 ‘LA 흑인 폭동’처럼 가장 약한 고리인 소수 인종끼리의 갈등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고 브루킹스연구소는 지적했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백인에 대해선 제대로 저항을 못 하니, 자신들보다 약해 보이거나 만만한 대상을 향해 분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1992년 일어난 LA 흑인 폭동 때도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분노한 흑인들이 한인 상점을 약탈하고 폭력을 저질렀다.

LA타임스는 지난달 “흑인들은 백인과 함께 미국을 만들어 오고도 여전히 사회 하층에 머무른 반면, 아시아계는 단기간에 상류 사회에 편입됐다”며 “아시안을 모범적 소수(model minority)로 보는 정서가 흑인의 박탈감을 키웠고, ‘중국 바이러스’ 같은 정치적 공격이 이에 불을 붙였다”고 분석했다.

아시아계를 향한 폭력이 잇따르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30일 백악관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신설하고, 피해자 구호를 위한 기금 4950만달러(약 567억원)를 배정했다. 복지부는 아시아계 대표들을 만나 고충을 청취하기로 했고, 법무부는 아시아 증오 범죄 수사·기소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