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전 세계 코로나 백신의 대량 생산을 위해 지식재산권(지재권) 보호를 유예하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5일(현지 시각) 공식적으로 밝혔다. 화이자·모더나 등이 갖고 있는 배타적 특허권에 대한 보호를 일정 기간 유예해 다른 나라 제약사들도 백신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즉각 “역사적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실현까지 난관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코로나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에 도착해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웃고 있다. 바이든이 방문한 음식점은 코로나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받은 곳이다. 바이든은 이날 백악관에서 '코로나 백신 지식재산권 보호 유예를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 고 답했다/로이터 연합뉴스

캐서린 타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코로나19 대유행이란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조치를 요구한다. (미국) 행정부는 지재권 보호를 강력하게 신봉하지만 이 대유행 종식을 위해 백신의 (지재권) 보호 유예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앞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이날 백악관에서 “백신 지재권 보호 유예를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Yes)”고 답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도는 작년 10월 2일 세계무역기구(WTO)에 코로나 확산세가 수그러들 때까지 코로나 백신의 지재권 보호를 중지해 세계 각국이 값싼 복제 백신을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약 7개월 만에 미 정부가 기존 반대 입장을 뒤집고 긍정적 의견을 낸 것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기념비적 순간”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미국이 중대한 시기에 세계 모든 이들의 안녕을 우선하는 백신 공평성에 대한 ‘역사적 결정'을 한 데 찬사를 보낸다”며 “이제 모두 신속하게 움직이자”고 했다.

실제 지재권 보호 유예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WTO 협상이 만장일치를 채택하고 있고, 협상이 타결된다 해도 제약사들이 반대할 경우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타이 USTR 대표는 성명에서 “WTO의 텍스트에 기반한(text-based)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면서도 “컨센서스(만장일치)를 기본으로 하는 WTO의 성격과 관련된 사안들의 복잡성을 고려해 볼 때 이런 협상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텍스트에 기반한 협상’이란 관련국들이 각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문안을 주고받으면서 모든 당사국이 합의할 수 있는 문안을 찾아가는 협상을 뜻한다.

힘받는 백신특허 면제… WTO회원국·美제약사 동의 남아

바이든 미 행정부가 5일(현지 시각) “코로나 백신의 지식재산권(지재권) 보호 유예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세계무역기구(WTO)의 관련 협상에 돌파구가 열릴지 주목된다. 코로나 백신 지재권 보호가 일정 기간 유예되고,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백신이 대량 생산된다면 코로나 사태는 빠르게 종식될 수 있다. 지재권 유예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극복해야 할 난관이 적지 않다. 남아공·인도 등 개발도상국들은 작년 10월부터 각국이 코로나 백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백신 개발사들의 배타적 특허권 행사를 일시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선진국 반대로 7개월 동안 뚜렷한 진전이 없었다. 화이자, 모더나, 존슨앤드존슨(J&J) 등의 제약사가 몰려 있는 미국이 이번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 큰 전환이지만 실제 코로나 백신 공급이 획기적으로 확대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지재권 보호 유예 빨라야 올 하반기

미국이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지재권 보호 유예까지는 적어도 몇 개월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백신 지재권 보호를 규정한 TRIPS(무역관련지식재산권협정)의 특정 조항들을 일시 유예하는 협상이 WTO에서 타결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WTO 회원 164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문안이 나와야 한다. 조만간 인도와 남아공이 새 협상 문안을 작성해 제시할 예정이지만, 아직 WTO 협상 일정조차 나오지 않았다. 기존에 지재권 보호 유예에 찬성 의사를 밝힌 나라는 164국 중 60국으로 알려졌다.

미 무역대표부에서 일해본 적 있는 클리트 윌렘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은 로이터 통신에 “(협상안 마련에만) 최소 한두 달은 걸릴 것”이라며 “오는 11월 30일~12월 3일로 예정된 차기 WTO 장관회의에서 협상을 마무리짓는 것이 더 현실적 목표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164국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지재권 보호 유예는 무산되는데 “현재 유럽연합(EU), 영국, 스위스, 일본, 브라질, 캐나다, 호주 등이 반대하고 있다”고 미 의회 전문 매체 ‘더 힐’은 전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6일 지재권 유예 방안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 국가는 백신 제조할 기술·시설·인력 없어

코로나 백신 개발사들은 지재권 보호 유예가 이뤄져도 백신 공급이 크게 늘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는 화이자나 모더나처럼 mRNA(전령 RNA)란 신기술을 사용한 첨단 백신을 제조할 기술적 역량을 갖춘 시설과 인력이 없다는 것이다. 화이자 백신 제조에는 280개 물질이 필요한데, 19국의 86개 회사에서 이를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제약협회(PhRMA)는 지재권 보호 유예 결정이 “이미 압박을 받고 있는 (원료) 공급망을 더 약화시키고 가짜 백신의 확산을 조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론 클라인 백악관 비서실장은 지난 2일 CBS 뉴스에 “지식재산권은 문제의 일부”라며 “제조 자체가 가장 큰 문제다. 미국은 백신을 만들 능력을 모두 가졌지만 (그런 경우에도) 다른 문제로 백신을 생산하지 못하는 공장들이 있다”고 말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존슨앤드존슨 백신을 생산하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공장에서 코로나 백신 배합 실수가 있어 생산이 중단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약사들 반발하면 수년 걸릴 수도

WTO가 지재권 보호 유예를 결정하더라도 화이자·모더나 같은 제약사들이 개발도상국 기업들에 기술을 지원해야 할 의무는 없다. 또 특허권을 가진 제약사들이 WTO 결정에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실제 특허권 보호 의무 면제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망했다.

이 때문에 지재권 유예로 피해를 보게 될 제약사들에 어떤 보상을 해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실제로 백신 특허권을 규정한 TRIPS(무역관련지식재산권협정)에는 공중 보건 비상사태 해소를 위해 지재권 보호를 유예할 경우,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WTO 협상 과정에서 이 부분이 논의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미 하원 조세무역위원회의 보건소위 위원장인 로이드 도깃 의원은 “지재권 보호 유예가 되면 미국 제조사들에 합당한 로열티를 보장하면서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개발된 백신 제조법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 지재권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풀려나갈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화이자, 모더나, 존슨앤드존슨 등의 주가는 이날 한때 급락했다. 화이자는 증시가 마감되기 전에 주가를 회복했지만, 모더나는 6.1% 하락, 존슨앤드존슨은 0.4% 하락으로 장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