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있는 복합아트센터 ‘더 셰드.’ 날렵한 양복, 명품 드레스를 차려 입은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세계적인 아트페어(미술 전시·판매)인 ‘프리즈(Frieze) 뉴욕’이 일반 개막한 날이다. 올해 프리즈 뉴욕은 지난해 3월 코로나 팬데믹 이래 미국에서 14개월 만에 열린 첫 대형 아트페어다. 코로나로 초토화됐던 뉴욕 예술 산업의 전면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뉴욕과 각국의 유명 현대미술 작가들 작품을 모아놓고 파는 이 아트페어의 입장료는 90~265달러(약 10만~30만원). 적지 않은 금액인데도 입장권 1만여 장은 이미 몇 주 전 매진됐다. 미술품 구입 선금 1260달러(약 140만원)를 내고 얻을 수 있는 VIP 표도 추가로 내놨지만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한 부스에서 그림 몇 점의 가격을 물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저건 23만달러(약 2억5800만원)인데, 어제 VIP 프리뷰(미리 보는 행사)에서 텍사스 댈러스에서 온 사업가가 이미 샀다”며 “그 옆 25만달러 짜리(약 2억8000만원)는 LA 손님, 또 저건 시카고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다. 손님들이 그림 쇼핑을 하러 전용기를 타고 뉴욕에 왔다 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스에선 운동화 차림의 40대 부부가 회화 소품을 들여다보며 “7만달러(약 7800만원)면 투자로 나쁘지 않다”며 소곤댔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 전역의 컬렉터들과 부자들이 돈 싸들고 프리즈 보러 온다고 난리였다. 팬데믹 불황 여파로 올해 장사가 될까 걱정했던 미술업계도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이날 아트페어 현장은 코로나를 이겨낸 미국 경제의 급격한 회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코로나 백신 보급과 함께 폭발적으로 살아나는 미국 소비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지난달 29일 미 상무부는 올 1분기 경제 성장률을 연율 6.4%로 발표했다. 18년 만의 최대치다. 코로나 침체의 기저효과를 감안하더라도 주요 경제권으로선 신흥국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이다. 며칠 뒤인 3일엔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3인자인 뉴욕 연준 총재가 “올해 미 경제가 7% 성장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40여년 만에 가장 빠른 경제 회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목표치를 또 올려잡았다.
지난겨울부터 코로나의 암울한 풍경이 채 가시지 않은 뉴욕 부촌에선 람보르기니·벤틀리·부가티 같은 유럽산 초고가 수퍼카들이 갑자기 많이 눈에 띄었다. 맨해튼의 한 럭셔리카 중개인은 CNN 인터뷰에서 지난해 4분기에만 매출이 60% 늘었다며 “40년간 장사했지만 요즘처럼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부자들이 돈 쓸 데가 없어 안달이란 것이다. 지난달 미국 자동차 총 판매량은 1850만대를 기록, 금융 위기 이전인 1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로 크게 휘청였던 뉴욕의 주요 산업인 부동산 시장도 빠르게 회복 중이다. 월가 금융사들의 사무실 복귀가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상가 공실률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지난해 50%까지 폭락했던 임대료도 다시 치솟고 있다. 특히 뉴욕 일대 주택 구입자 중 생애 첫 집을 마련한 사람의 비율은 예년 20%대에 그쳤다가, 지난 1분기 42%로 뛰었다. 폭스 비즈니스는 “생애 첫 주택 구입 비율이 크다는 것은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했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는 직접 요인은 이런 소비 덕이다. 코로나 백신 보급이 본격화된 지난 1분기 미국 소비는 10.7%나 급증했다. 소비는 미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백신에 힘입어 경제 봉쇄가 풀리면서, 소비가 폭발하고, 이것이 그대로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경제 봉쇄가 풀리면서 ‘보복 소비’가 거의 전 계층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정부에 이어 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인당 3200달러(약 360만원)가 넘는 코로나 지원금이 세 차례에 걸쳐 거의 전 국민에게 지급됐다. 미국인들은 외식이나 단순 소비재 구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장기 여행을 가고, 가구를 바꾸고 집을 새로 짓는 등 내구재 소비, 명품 소비와 예술품 투자로 나가고 있다. 미국 가계의 주식 보유액도 전체 금융자산의 41%로 사상 최대치에 달한다.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올 1분기 말 기준 미 국민의 초과 저축액(2019년 소비 규모에 비해 이후 소비를 대신해 늘어난 저축액)은 총 2조달러가 넘어 미 국내총생산(GDP)의 12% 수준까지 늘었다. 지난 20여년간 미 가계 평균 저축률은 6%에 불과했지만, 팬데믹 와중 이는 16%로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팬데믹 기간 고소득층일수록 돈 쓸 데가 없어 저축액은 늘고, 주가는 오르고, 여기에 코로나 지원금까지 받으면서 가처분 소득이 근래 보기 드문 규모로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소비 폭발에 따른 급속한 경제 회복 속에 인플레이션 등 경기 과열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기저귀부터 자동차, 목자재 등 각종 원료와 완성품 가격이 모두 치솟고 있는데, 이는 팬데믹 중 망가진 공급망의 복구 속도가 수요 폭발을 따라가지 못해 나타나는 측면이 크다. 미 연준은 6일 “조만간 주식 등 일부 자산 가격이 폭락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미 각 주정부와 대도시는 이 ‘소비 빅뱅’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방역 완화와 소비 촉진에 서두르고 있다. 특히 코로나로 사람도 떠나고 돈도 떠났던 최대 도시 뉴욕의 절박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코로나로 총 3만여명이 사망한 뉴욕시 백신 접종에 사활을 걸어 성인 접종률이 50%를 넘으면서 최근 감염·사망자 수가 현저히 줄었다.
뉴욕시는 당초 오는 7월 1일을 기해 상점과 식당, 미용실, 체육관, 극장, 박물관, 학교와 사무실 등 모든 시설의 인원 제한을 철폐하는 ‘완전 정상화’를 선언했는데, 며칠 만에 주 차원에서 이 시점을 5월 19일로 확 앞당겼다. 술집과 식당의 자정 이후 영업 규제도 철폐돼 24시간 영업이 가능해지고, 지하철도 24시간 운행하게 된다. 이미 뉴욕 일대 교통과 물동량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거의 회복됐다. 브로드웨이 공연가, 링컨 센터 등의 대형 음악회와 발레 공연, 메츠 갈라 패션쇼 등 뉴욕의 주요 예술 산업도 본격적인 재정비에 돌입해 올 9월부터 정상화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