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뉴욕에서 열린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의 캠페인 ‘골키퍼스 2019’에서 연설 중인 멀린다 게이츠. 2021년 5월 빌 게이츠와 이혼을 발표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아내 멀린다 게이츠(56)가 지난 3일 이혼을 발표한 이래 미국에서 활기를 띠는 분야가 있다. 바로 자선업계다. 지난 20여년간 이 부부 명의의 글로벌 자선재단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파운데이션’의 설립과 활동은 사실상 멀린다가 주도해왔는데, 그가 이혼으로 천문학적인 재산을 분할받아 각종 기부 사업에 ‘실탄’을 공급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다.

미 CNN은 11일(현지 시각) “멀린다 게이츠의 이혼은 기부 분야에 새 장을 열 것”이라며, 멀린다의 사회적 관심사와 기부의 궤적을 분석해 그가 향후 수십 년간 선보일 기부 포트폴리오를 분야별로 예측했다. 크게 정치·과학기술·경영 등 남성이 독식했던 분야에 여성과 소녀들의 진출을 돕는 일, 소외 계층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지키는 일, 코로나 백신의 각국 공여와 팬데믹 예방, 빈곤층의 디지털 정보 격차 해소, 미국 가정의 유급 육아휴가 지원 등이 꼽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게이츠 부부의 이혼은 독립적인 억만장자 여성들이 ‘남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과 함께 자선업계의 지형을 바꾸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1450억달러(약 163조2700억원)로 추산되며, 워싱턴주법에 따라 멀린다에게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떼어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이혼 발표와 함께 20억달러(2조2300억원) 주식이 멀린다에게 이전되는 등 재산 분할이 본격화됐다. 이들의 자선 재단엔 20여년간 빌 게이츠 재산 550억달러(62조원)가 투입됐지만 재산 태반은 빌 개인 소유로 남아있었다. 이 기부 비율의 구도를 바꾸는 계기가 이혼이라는 것이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전처인 매킨지 스콧.

억만장자 전처의 ‘통 큰 기부’는 가까운 전례가 있다. 세계 최고 부호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의 전처 매킨지 스콧(51)은 지난 2019년 베이조스의 외도로 인한 이혼 이래 2년여간 작심하듯 공격적인 기부를 펼쳤다. 이혼으로 383억달러(43조원)를 받은 직후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고액 기부자 모임)에 가입하며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하더니, 실제 2020년 한 해에만 코로나로 타격받은 극빈층을 위한 긴급 구호기금, 흑인 대학 지원 등에 쓰도록 60억달러(6조7000억원)를 내놨다. 특히 매킨지는 자문가 그룹을 짜 6500여곳의 미 자선 단체를 저인망식으로 검토해 384곳의 지원 대상을 선별하는 방식과 속도로 놀라움을 안겼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아내 로린 파월 잡스.

앞서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2011년 사망한 뒤 아내 로린 파월 잡스(51)도 상속받은 100억달러(11조원)를 들고, 남편이 생전 그토록 백안시했던 자선 사업에 뛰어들었다. 저소득층의 대학 진학 지원, 불법 이민자 출신 지원, 그리고 고품질 언론과 저널리즘 지원 등이 주력 분야다.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의 아내이자 의사인 프리실라 챈(36)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란 사회사업 재단을 통해 공립학교 지원과 인종·성 평등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의 아내 프리실라 챈.

특히 멀린다와 매킨지는 미 여성 부호들의 롤모델이자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고 FT는 전했다. 이들 덕에 ‘백인 남성 기업인들이 은퇴 즈음 벌이는 이미지 홍보 사업’ ‘남편 돈으로 남편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 아내가 하는 내조’ 정도로 인식되던 자선 사업이, 기업가 정신을 갖춘 30~50대의 신흥 여성 부자들이 단독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문 분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와 뉴욕 등에선 여성 부호들의 기부금을 따내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컨설팅 업체만 수십 곳 성업 중이다. 이들은 ‘비슷한 수준의 고소득층일 경우 여성의 기부액이 남성보다 두 배 많고, 싱글 여성이 싱글 남성보다 기부 욕구가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젊은 여성 부호들은 거액을 기부하고 건물에 이름을 남기는 기존 방식엔 큰 관심이 없는 반면, 빈곤 구제부터 계층·인종·성 평등, 교육·환경·의료 등의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 자신의 투자가 빚어내는 실질적 변화를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