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245주년을 맞은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의 원인을 둘러싼 한 이론을 놓고 ‘문화전쟁(culture war)’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CRT)’이라 불리는 이론이다. CRT라는 용어를 놓고도, 좌‧우파의 용법(用法)도 판이하다. 민주당과 좌파에선 CRT가 인종차별‧인종주의의 개선을 요구하는 모든 노력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반대로 공화당 우파에선 미국 역사를 ‘백인 우월주의’로만 묘사해 부인하려는 사악한 역사관으로 보고 거부한다. 이념적으로 반(半)으로 쪼개진 미국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보다 보수적인 폭스(Fox)뉴스에선 지난 7개월 동안 CRT라는 표현을, 리버럴 방송매체인 CNN과 MSNBC 방송 두 곳이 언급한 것보다 2배반이나 더 사용했다. 또 공화당이 장악한 5개 이상의 주(州)의회가 공공교육에서 CRT를 금지했고, 다른 9개 주에서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 도대체 CRT가 뭐기에 이럴까.
◇ CRT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미국 제도‧구조에 밴 인종주의 제거해야”
CRT는 미국의 인종주의[인종차별]가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깊이 밴 것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19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인종차별 제거에서 한계를 드러낸 뒤, ‘구조적 문제’를 들고 나온 흑인 법이론가들은 “인종 간 불평등의 해법은 학교‧의료기관‧교도소 등 제도‧기관이 기능하는 방식을 바꾸는데 있다”고 봤다. 미국의 법체계, 역사성 자체가 백인 우월주의를 토대로 하고 이를 지지한다는 시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작년 5월 미네소타주에서 백인 경찰에 질식사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나 코로나바이러스에서 흑인 사망률이 유독 높은 것은 ‘일탈적 현상’이 아니다.
영국 시사잡지 이코노미스트와 유고브(YouGov)가 6월말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응답자의 CRT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 과반이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인종주의가 ‘개인의 문제’냐, ‘더 큰 사회 구조적 문제냐’는 질문엔 57%가 후자를 택했다.
◇NYT의 ’1619 프로젝트'와 트럼프의 ’1776 위원회' 간 ‘역사 논쟁’
지금의 논쟁에는 2019년 8월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1619년 프로젝트'도 크게 한몫을 했다. 이 프로젝트는 식민지 버지니아의 한 해안에 아프리카 노예 20여 명이 처음 도착한 1619년 8월을 미국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교육용 프로젝트다. 2019년은 흑인 노예가 도착한 지 400주년 되는 해였다. ’1619년 프로젝트'는 흑인 노예들과 흑인들의 기여가 미국의 건국 역사 중심에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를 “미국을 파괴하는 유독한(toxic) 선전, 이데올로기”로 규정하고, 지난 1월18일 퇴임 직전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생일에 맞춰 ’1776 위원회'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1776 위원회’는 “노예제는 당시 미국에만 존재했던 악(evil)이 아니며, 따라서 노예제를 둔 채 자유를 외쳤다고 해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위선자는 아니다” “미국이든 어느 나라든 평등과 자유, 정의, 합의에 의한 정부라는 보편적 진리에 맞게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미국 이전에 어느 나라도 이러한 진리를 정치의 공식적인 기초로 삼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미국인들보다 이 진리를 구현하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좌‧우파 모두 CRT를 세(勢)결합의 캐치프레이즈로 사용
미국의 좌파는 ‘백인우월주의’든, ‘인종차별’이든,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와 같은 전국적인 시위‧소요든, 역사 부정(不定)이든,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모든 정책을 CRT로 묶었다.
물론 공화당 우파도 CRT란 용어가 백인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내는 단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NYT는 6월28일 “학부모들도 미국이 백인우월주의 이념 위에 세워졌고, 모든 백인 아이들과 가족은 결국 이 백인우월주의의 ‘공모자’라는 CRT 교육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결국 실존하는 제도적 인종차별적 요소를 파헤치고, 인종 간 평등을 이루려는 정책이나 교육‧훈련에서 인종 간 다양성을 보장하려는 어떠한 시도조차도 모두 CRT로 몰려, ‘합리적 중도’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연방상원의원은 “미국의 제도가 다른 인종을 희생시키고 백인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했다”는 CRT의 주장을 “백인은 기본적으로 인종차별주의”라는 논리로 비약시킨다. 그리고선 “CRT는 과거 흰옷을 뒤집어 쓴 KKK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이라고 공격한다.
◇교실로 번진 CRT 역사 논쟁
학교에서 CRT를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는 백인 보수주의자들은 “CRT는 국가는 원래 악(惡)이고 백인은 자신의 피부색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는 이론”이라며 “기본적으로 백인에 적대적이고, 자본주의와 미국의 건국 정신을 부정하는 교육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의 전국적인 소요도 이 CRT 시각에서 촉발된 것으로 본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공화)는 지난 3월 “분명히 말하는데, 아이들에게 자기 나라와 서로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CRT 같은 것이 우리 교실에 들어설 자리는 없다”고 선언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와 관련, “교사 대부분은 CRT라는 말을 쓰지도 않고 이를 담은 책을 권장하지도 않지만, 인종 간 평등을 강조하다보면 ‘미국에서 인종주의는 제도화돼 있다’는 이 이론의 기본 주제를 반영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3일 미 하원 국방위원회에서 공화당 의원은 마크 밀리 합참의장에게 “왜 미 육사에서 CRT를 가르치느냐”고 따졌다.
밀리 합참의장은 “나는 칼 마르크스도 읽고, 레닌도 읽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다”며 “미 육사에서 CRT를 비롯해 다양한 의견과 시각을 가르치는 것이 뭐가 잘못됐느냐”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