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미 국무부 홈페이지 캡처

21일 오전 9시 일본 도쿄의 외무성 이쿠라(飯倉) 공관에서 한·미·일 3국 외교차관 협의가 열렸다. 한·일 관계가 최악인 가운데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을 한데 모은 것은 지난 4월 취임 후 처음 동아시아 순방에 나선 웬디 셔먼(72) 국무부 부장관이었다. 한·미·일 3국 협력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일 갈등 진화를 위해 ‘백발 마녀’로 불리는 셔먼 부장관을 긴급 투입한 것이다.

셔먼은 이번 회의에서 한⋅일 양국의 차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양국 관계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부는 이날 협의 후 “(셔먼) 부장관과 (한·일) 두 외교차관들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약화시키거나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위협하는 모든 행동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을 향해 견제구를 던진 것이다. 국무부는 또 셔먼 부장관과 두 차관들이 “기후변화, 전염병 대응, 경제적 탄력성과 회복 등 21세기의 세계적 도전들을 다루기 위해 삼각 협력을 심화하기로 약속했다”고도 했다. 한국 외교부도 3국 차관이 “정기적으로 만나 3국 간 긴밀한 소통을 이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셔먼이 한⋅미⋅일 3각 관계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20년이 넘는다. 셔먼은 1999년 5월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자문관으로 일할 당시 서울과 도쿄를 방문해 당시 장재룡 외무부 차관보, 가토 료조 일본 외무성 종합정책국장과 함께 한·미·일 3자 대북정책조정감독회의(TCOG)를 개최했다. 그는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승격된 후에도 TCOG를 이끌며 한·미·일 3국 협력 체제 구축에 기여했다.

최종건 한국 외교부 1차관(가운데),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오른쪽),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21일 오전 일본 도쿄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를 마치고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한·일 관계 개선에 집중한 나머지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내던 지난 2015년 셔먼은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과거사는 한·중·일 3국 모두가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하자”고 말했다.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가볍게 보는 것'이냐는 문제 제기가 뒤따랐지만, 한·일 관계 개선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미국의 속내를 반영한 것뿐이란 평가도 있었다.

이런 셔먼이 다시 한·미·일 3국 협력 정기화에 투입된 것은 3국 협력을 중시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총리에게 여러 차례 한·일 관계 개선을 당부했고, 3국 정상회의 개최도 계속 요청하고 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3국 협력 강화는 바이든 대통령이 중시하는 사항”이라며 “그래서 백악관과 국무부 모두 기회가 될 때마다 한·일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일본 도쿄의 외무성 이쿠라(飯倉) 공관에서 최종건(왼쪽) 외교부 1차관, 웬디 셔먼(가운데) 미 국무부 부장관,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3국 외교차관 회의를 갖기 전 에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셔먼은 2000년대 초반의 북핵 협상과 2015년 이란 핵 합의 협상에 모두 관여하면서 ‘백발 마녀’란 별명을 얻었다. 그만큼 업무 스타일이 집요하고 냉정하다는 것이다. 협상 상대였던 이란의 파르스 통신도 그를 “빗자루를 휘두르는 마녀”로 묘사했다.

그런 셔먼은 지난해 ‘심약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Not for the Faint of Heart)’이란 회고록을 펴내면서 자신이 10대 시절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집순이(homebody)”였다고 썼다. 먼 훗날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과 군축 협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같은 여성 멘토들을 통해 워싱턴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국무부는 셔먼이 18~25일로 예정된 일본, 한국, 몽골 순방 직후 중국으로 이동해 25~26일 왕이 외교부장 등 중국 당국자를 만난다고 밝혔다. 지난 15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셔먼이 중국을 동아시아 순방에 포함시키고 싶어했지만 중국 측이 ‘미국 외교위 서열 2위'인 셔먼과 맞지 않게 중국 외교부 서열 5위인 셰펑 미국 담당 국장과 만날 것을 주선해 중국을 방문지에서 제외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셔먼과 왕 부장이 어떤 형식으로 만날지 주목된다.

왕 부장은 명목상으로는 중국 외교부 부장(장관)이지만, 미국에서는 실질적으로 공산당이 행정기관인 국무원보다 우위에 있는 중국 체제상 외교 1인자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전임 트럼프 행정부의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이나 토니 블링컨 현 국무장관은 중국 외교의 사령탑인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을 상대해 왔다. 셔먼과 왕 부장이 만남이 실질적 ‘외교 2인자’끼리의 만남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