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세를 내지 못한 세입자들을 쫓아내지 못하게 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세입자 퇴거 유예’ 조치를 두고 미국 사회가 다시 분열하고 있다. 백악관과 민주당은 코로나 장기화로 소득이 급감한 세입자들이 길거리로 쫓겨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며 퇴거 금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공화당은 “집세를 못 받고 있는 집주인들의 경제적 피해도 상당하다”고 맞서 정면충돌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미 정부가 퇴거 유예 조치 기한을 또 다시 연장하자 집주인들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에 나섰다.
바이든 행정부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지난해 9월 ‘세입자들이 거주지에서 쫓겨나 보건 위험에 노출되는 사태를 막겠다’며 전국적으로 퇴거 유예 조치를 시행했다. CDC는 올해 6월 말 만료 예정이던 이 조치를 7월 31일까지 다시 한 번 연장했다. 이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의회의 관련 입법이 선행되지 않으면 (행정부가) 퇴거 유예 기간을 (계속)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정부의 연장 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지난달 30일 퇴거 유예 시한을 연장하는 법안 처리를 시도했지만, 공화당이 반대해 무산됐다.
그럼에도 CDC는 지난 3일(현지 시각) ‘코로나 확산 우려 지역’에 한정한다는 단서를 붙여 퇴거 유예 기간을 추가로 2달 연장하기로 했다. 공화당은 ‘의회 입법 없이 행정부가 유예 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정한 것은 위헌(違憲)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공화당은 “무작정 퇴거 조치를 막기만 하면 집주인들은 경제적 위기에 몰릴 것”이라며 “이는 부동산 업종 붕괴 및 은행·신용카드·차량 등 관련 업계 불황으로 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든 정부는 임차료 지원용 연방예산 465억달러(약 53조5000억원)를 확보했지만, 아직 전국에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상황이다. 법적 소송에 휘말리더라도 이 예산 배분이 완료돼 집행이 가능하도록 시간을 벌겠다는 계획이라고 외신 매체들은 분석했다. 위헌 논란을 의식한 듯 바이든 대통령도 3일 “이 선택(연장)이 합헌적 조치인지 말할 수 없다. 모르겠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백악관이 의회에 퇴거 유예 연장안을 요청한 것은 만료(7월 말) 불과 이틀 전이었다”며 “백악관의 뒤늦은 요청에 민주당 지도부가 분노했다”고 했다.
바이든 정부의 연장 조치에 집주인들과 세입자도 충돌했다. 임대인 단체인 전미부동산중개인협회(NAR)의 앨라배마 및 조지아주(州) 지부는 4일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에 퇴거 유예 조치 연장을 취소해 달라는 긴급 신청을 제기했다. 작년 9월부터 ‘퇴거 유예 조치’가 계속되면서 돈을 받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임대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집세 대란’이 벌어지는 것은 미국의 주택 임대차 제도가 월세(月貰)로만 이뤄져 있으며 미 국민의 약 3분의 1인 1억명(4300만 가구)이 월세로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자 서민 가계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월세를 못 내는 경우가 속출했다. 퇴거 유예 조치가 없을 경우 길거리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미국인은 수백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 인구조사국이 6월 마지막 주와 7월 첫째 주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약 740만명이 임대료를 체납했다고 답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360만명은 향후 2개월간 퇴거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집주인들 상당수도 1년 넘게 월세를 받지 못하면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이들도 건물 대출금이나 관리비, 재산세 등을 매월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임대인들 중엔 모기지(mortgage·주택담보대출)를 끼고 산 집을 세 놓아 생계 수단으로 삼는 은퇴 인구 비율이 높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법적인 근거가 약한 이번 세입자 퇴거 유예 연장 조치로 정치권의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