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 칸다하르와 제3의 도시 헤라트가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에 함락됐다고 AP통신이 13일 전했다. AFP통신은 이날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서 남쪽으로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로가르주(州)의 주도(州都) 풀리 알람도 장악했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이 파죽지세로 아프간을 장악해감에 따라 조만간 반(反)정부 세력이 수도 카불에 진입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미군의 철수 완료 시한으로 정한 이달 31일을 2주가량 남기고 탈레반이 빠르게 진격하자, 영국 가디언지는 “탈레반의 칸다하르 점령이 확인되면서 아프간이 사이공 함락과 비교되고 있다”고 했다. ‘월남 패망’의 날처럼 수도 카불이 곧 함락되고 아프간 전역이 탈레반 수중에 떨어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해 있다는 뜻이다.
아프간 상황은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4월 “미국의 가장 긴 전쟁을 끝내야 할 때”라며 미군 철수를 발표한 뒤 급격히 악화해 왔다. 미군이 훈련과 장비를 지원한 정부군 약 30만명이 있지만 분열된 아프간 지도부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11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두 달 전 임명했던 군 최고사령관을 급히 교체했지만, 전황을 뒤집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이처럼 정세가 급격히 악화하자 미 국무부는 이날 현재 4200명 수준인 주아프간 대사관 인력을 대폭 줄여 “핵심 외교 인력만 남기고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카불에는 외교 인력을 보호하는 미군 650명이 있는데, 미 국방부는 철수를 도우려 해병대와 육군 보병대 등 추가 병력 약 3000명을 급파했다. 아프간 상황이 더 악화할 경우에 대비해 미 본토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 있는 병력 약 3500명은 인근 쿠웨이트로 이동할 예정이다. 미군에 협조했던 아프간 현지 통역관과 그 가족 등을 철수시키기 위한 육군·공군의 합동 병력 1000명도 곧 파견된다.
영국 국방부도 아프간 내에 남아있는 자국민 약 4000명의 철수를 위해 병력 600명을 파병한다고 밝혔다. 캐나다도 주아프간 대사관을 폐쇄하고 모든 인력을 철수시키기 위해 특수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난민 36만명 탈출행렬… “여성·아이에겐 지옥 될것”
미군의 완전 철군을 2주가량 앞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재집권을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대탈출이 본격화하고 있다. 유엔국제이주기구(IOM)는 10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에서 5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레반의 공격으로 거처를 잃었고, 35만9000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난민 중 상당수는 밀무역 트럭에 몸을 싣고 국경을 넘거나, 탈레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정부군 통제 지역으로 대피하고 있다. 1970년대 월남 패망 후 보트피플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 BBC방송은 13일(현지 시각) 아동 구호 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을 인용해 아프간 어린이 7만2000명이 탈레반이 점령한 거주지를 떠나 수도 카불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아프간 국민은 탈레반이 재집권하면 여성·어린이 인권을 강도 높게 탄압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20년 전인 지난 2001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아프간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프간 사람들은 공개 처형과 가혹 행위를 일삼는 탈레반의 공포정치하에 살았다. 특히 여자 어린이는 기본적 교육도 받지 못했고, 여성은 취업 활동을 제한받은 채 집 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탈레반이 떠나간 지난 20년간 아프간의 여성·어린이 인권은 크게 개선된 상태다. BBC방송에 따르면 2017년 아프간의 여자 중학생 수는 350만명으로 전체의 39%를 차지한다. 텔레반 치하의 1999년에는 아프간 전체에 여중생이 한 명도 없었고, 새 정부가 들어선 초기인 2003년에는 240만명이었다. 고등 교육을 받는 여성도 크게 늘어 현재 아프간 대학생의 약 3분의 1이 여성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졌다. 현재 아프간 여성의 5분의 1이 직장을 갖고 있다. 개인 사업을 하는 아프간 여성도 수천명이다. 경제력을 갖춘 여성의 가정 내 지위는 높아졌다.
그러나 탈레반이 재집권하게 되면 여성과 어린이 인권 시계는 2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따라 여성들은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을 할 수 없고, 외출할 땐 신체 노출을 피하고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는 ‘부르카’를 착용해야 한다. 부르카는 눈 부위까지 망사로 덮기 때문에 니캅(눈 제외 전신 가리는 복장), 차도르(얼굴 제외 전신 가리는 망토), 히잡(머리카락과 목을 가리는 헤어 스카프)보다 훨씬 엄격하다.
미셸 바첼렛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여성이 남성의 허락 없이 집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면 가정에서 일련의 폭력을 낳게 된다”고 했다. 남편이 아내를 소유물처럼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폭력을 휘두르고, 발이 묶인 아내는 경제 활동이 불가능해진다는 의미다.
탈레반 치하에서 자유 연애와 결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WSJ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탈레반은 북부 타하르주의 루스타크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 주민들을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불러 모은 뒤 “15세 이상의 모든 소녀와 40세 미만의 과부는 반드시 탈레반 군인들과 결혼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여자 아이들의 교육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탈레반은 여자 아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필요 없다며 학교에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레반은 최근에도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학교를 장악하고, 여학교는 문을 닫거나 아예 불태운다. 지난 5월 9일 수도 카불 시내 여학교 3곳에 대규모 폭탄 공격이 발생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현지 언론은 이 사건의 배후가 탈레반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탈레반이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인명 피해도 심각하다. 유엔아프간지원단(UNAMA)에 따르면 올 1~6월 아프간 사상자 수는 5183명(사망 1659명)이었는데 사상자의 약 32%가 어린이였고, 여성은 14%였다.
탈레반 치하를 경험하지 않은 아프간의 신세대가 탈레반 재집권 이후 극심한 충격을 받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BBC는 “현재의 아프간 젊은이들에게 탈레반 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지옥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