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파죽지세로 진격, 수도 카불을 위협하는 지경이 되자 미국에서는 미군 철수 결정을 번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월 철군을 발표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10일(현지 시각)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지난 20년간 수 조달러를 썼다. 30만명이 넘는 아프간 정부군을 훈련하고 현대적 장비를 갖춰줬다”고 했다. “아프간 지도자들이 통합해야 한다. 자신들을 위해 싸우고, 자기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간 정부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10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에서 수도 카불로 피난 온 한 어린이가 난민촌으로 쓰이는 한 공원에서 잠들어 있다. BBC방송은 13일 아프간 어린이 7만2000명이 카불 난민촌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로이터 연합뉴스

◇아프간 집권층 분열과 부패

실제 미군의 최신 장비로 무장한 아프간 정부군의 표면적인 전력은 탈레반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미군 철수 발표 4개월 만에 아프간의 65%가 탈레반에 점령당한 이유를 미 전문가와 언론들은 아프간 지도부의 분열과 부패에서 찾고 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지난 11일 “서류상으로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군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며 아프간 정부 측에 30만명이 넘는 병력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 데 비해 탈레반 병력은 7만5000명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아프간 군경에 “유령”으로 불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부패가 만연한 아프간에는 급여만 받을 뿐 실제 근무하지 않는 군인·경찰이 많을 뿐더러 때로는 정부 관료들이 가공의 인물을 명단에만 올려 놓고 급여를 착복한다는 것이다.

전투 능력을 갖춘 부대도 일부 있지만, 제대로 된 지휘·통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지난달 23일 미국의 격월간 잡지 ‘내셔널인터레스트’는 아프간의 명운에 결정적인 시기였던 지난 10개월 동안 국방부 장관이 공석이었다고 보도했다. 지도층 내 분열이 심한 가운데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직접 군을 지휘하려고 일부러 국방부 장관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4년과 2019년에 치러진 아프간 대선은 모두 선거 부정으로 얼룩졌다. 2019년 가니 대통령과 상대 후보 압둘라 압둘라가 모두 승리를 선언한 뒤 같은 날 카불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취임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경험이 풍부한 군사 전략가들이 아니라 가니 대통령과 소수의 측근이 군을 지휘하다 보니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가니 대통령은 6월 20일에야 국방·내무 장관과 군 최고사령관을 임명했지만 “너무 늦었고 이미 기반을 잃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탈레반에 함락된 제3도시 헤라트 - 13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제3의 도시 헤라트에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 소속 한 병사가 로켓 추진 유탄발사기(RPG)를 어깨에 짊어진 채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다. 이날 AP통신은 헤라트가 탈레반에 함락됐다고 보도했다. /AFP 연합뉴스

◇정부군, 탈레반 진격해오자 도주

이처럼 지도층이 분열돼 있다 보니 정부의 기강이나 군의 사기도 형편 없는 상태다. 수도 카불에서 1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즈니주(州)가 12일 함락됐는데, 얼마 후 다우니 라흐마니 가즈니 주지사가 카불 근처에서 아프간 정부군에 체포됐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아프간 내무부는 라흐마니 주지사가 탈레반과 합의하에 주를 넘겨주고 도망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CNN은 가즈니를 방어해야 할 정부군도 탈레반이 진격해 오자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도주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결국 미국이 아프간을 포기한 것이 탈레반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지난 2일 국제 정치 온라인 매체인 ‘인터내셔널 폴리시 다이제스트’는 월남 패망과 현 아프간 상황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려 월남군을 제치고 월맹 측과 협상을 벌였던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아프간 정부를 제치고 직접 탈레반과 미군 철수 협상을 벌였던 것을 지적했다. 그 결과 미군 철수가 발표되면서 급격히 전황이 기울었다는 것이다.

이 매체는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근본적 원인에 대해 “베트남과 아프간에서 모두 동맹과 적, 갈등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 미국을 잘못된 길로 가게 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전 때 미국이 남북 간의 지역 감정이나 월남군 내부의 문제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전쟁을 시작했던 것처럼 아프간에도 국가보다 부족이 더 중요한 사회의 성격 등을 충분히 고려한 장기적 계획 없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과 아프간에 미국이 원하는 정부나 사회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20년간 미군이 피 흘린 아프간을 다시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게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