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24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대표 화랑가인 소호(Soho) 거리. ‘조르주 베르제’라는 작은 갤러리 앞에 시민들이 계속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이들은 궁금한 표정으로 들어가려다 문이 잠긴 것을 알고 유리창에 휴대폰을 대고 안에 걸린 그림을 사진 찍었다. 뉴욕 현지의 언론 매체 취재진도 보였다. 갤러리 안쪽엔 직원이 세 명 보였지만 밖은 내다보지 않은 채 일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시민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돈세탁하느라 바쁜가 보네.”
이곳에서 단독 전시 중인 작가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51). 변호사이자 로비스트인 헌터는 아버지의 취임 즈음 전업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달 들어 LA에 이어 뉴욕에서 회화 작품 15점을 내걸고 첫 순회 전시를 열고 있다. 소호에 그의 그림이 걸린 것은 지난 23일이나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어렵게 관람 예약했던 기자도 이날 돌연 ‘당분간 관람객을 받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아 들어가지 못했다.
창문에 눈을 대고 갤러리 내부를 들여다보니 10호~80호 크기 정도의 회화 작품들이 보였다. 형체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나 신체 일부를 그린 듯한 그림이 많았다. 꼼꼼하고 화려한 채색, 흘려 쓴 금박 글씨로 뒤덮인 작품도 눈에 띄었다. ‘장식용으로 나쁘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어디선가 많이 본 그림 같은 느낌도 들었다. 헌터는 2년 전 처음 붓을 잡고 코로나 팬데믹 동안 LA 자택에서 그림에 몰두하며 마약 중독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생모와 여동생의 죽음, 이어 2015년 형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때문에 마약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헌터의 뉴욕 데뷔가 난관에 빠진 것은 야당과 언론, 미술계의 매서운 감시 때문이다. 헌터의 작품 제작부터 기획했다는 갤러리 측이 제시한 작품당 가격은 최저 7만5000달러(약 8800만원)에서 최고 50만달러(약 5억8700만원). 미술계에선 “작품성을 떠나 아무런 경력도, 시장에서 검증도 안 된 신진 작가로선 말도 안 되는 가격” “헌터의 성(姓·바이든)이 아니면 감히 부를 수 없는 액수” “미술 생태계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가격의 높고 낮음을 떠나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예술 작품을 팔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란 말도 있다.
최근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에서는 공화당 의원들이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을 향해 “인상파 대가인 모네, 드가의 그림도 50만달러짜리가 많다. 헌터의 그림이 그런 수준이라고 보느냐”고 몰아붙였다. 헌터의 전시회를 하는 갤러리 측이 뉴욕주로부터 소상공인 전용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5만달러(약 5800만원) 받아간 것도 도마에 올랐다. 공화당은 특검을 주장하고 있다. 내년 중간선거 승리 시 ‘특별 조사’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이날 갤러리 앞에서는 일부 시민들이 “헌터, 아빠 어디 가셨니?” “내 딸도 집에서 그린 그림 있는데 1만달러(약 1170만원)만 받고 팔아야지”란 조롱을 쏟아냈다.
가장 큰 문제는 바이든 정부에 줄을 대거나 환심을 사려는 외국 정부나 기업, 유력 자산가 등이 헌터의 그림 구매를 로비나 돈세탁 창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설립 6년 된 이 갤러리의 대표이자 터키계인 조르주 베르제는 과거 “중국 미술 시장을 리드하고 싶다”며 중국 시장에 수년간 공을 들여온 인물이다.
백악관은 겉으론 “대통령 아들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 윤리 문제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속으로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 등이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자녀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용해 정치 경력을 쌓거나 사업한 것을 비판해온 바이든 정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최근 백악관은 ‘그림 로비’를 차단하기 위해 갤러리 측이 그림 구매자의 신원을 헌터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비공개에 부치도록 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있다고 해서 작가가 구매자를 끝까지 모르기는 힘들고, 오히려 대중의 검증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터의 그림은 지금까지 7만~8만달러짜리 3점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