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발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 기사가 별세 24년 만에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스(NYT)에 실렸다. NYT는 25일(현지 시각)치 부고면의 절반을 할애해 김 할머니의 기구한 생애와 위안부 피해 첫 증언의 역사적 의미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부고는 1851년 NYT가 창립한 이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지만 당대엔 큰 부고 기사로 유력 인사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인물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기획 연재 ‘더 이상 간과하지 않겠습니다(Overlooked No More)’로 마련됐다. 주로 여성 등 소수자를 다루는 이 코너에 한국인 중에선 항일 운동가 유관순 열사가 등장한 적 있다.
바이든 정부 등 각국 여론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NYT가 김 할머니를 ‘소환’한 것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가 13명밖에 안 남은 지금, 위안부 단체의 횡령 논란으로 정작 피해자들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일본 주류에선 위안부 모집 강제성을 부인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김 할머니는 67세이던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17세 때 일본군 위안소에 강제로 끌려가 매일같이 일본군을 여러 명 상대해야 했다”며 “나 같은 사람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증언했다. 30년 전 이 증언을 다시 소개한 NYT는 “성폭력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한국 문화에서 용기 있게 나선 김학순의 강력한 설명은 일본의 많은 정치 지도자가 수십 년간 부인해오던 역사에 생생한 힘을 실어줬다”고 평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 238명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호주와 네덜란드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전시(戰時) 여성 인권유린 문제에 눈뜬 세계 여론에 굴복한 일본은 1993년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김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한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됐다. 2007년 미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이나 2010년 시작된 해외 위안부 기림비 설립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지난 1998년 유엔 보고서에서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반(反)인류 범죄’로 규정한 게이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은 최근 한 학술 대회에서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것도 김 할머니의 30년 전 직접 증언이 미친 영향력의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밝혔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는 NYT에 “김학순의 첫 증언은 유엔이 규정한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과정을 촉발한 학술 연구를 가능케 했다”며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용기 있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NYT는 이런 김 할머니의 업적 뒤 개인적 삶에 대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군 위안소에서 만난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으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자녀 둘은 어릴 때 사망했다. 홀로 가정부와 청소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았다. 김 할머니는 전 재산 2000만원을 이웃에 기부하고 1997년 12월 16일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