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2일 이례적으로 과거 트럼프에 대한 기사 중 상당 부분을 고치고, 두 건의 기사와 관련 비디오를 삭제했다. 샐리 버즈비 편집인은 “트럼프 시대 최대 뉴스 중 하나(러시아와의 대선 공모)에 대한 주요 보도가 틀렸다”고 시인했다.

◇”트럼프, 러시아 호텔서 창녀들과 소변 파티” 주장

2017년 1월 10일, 인터넷 매체 버즈피드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 당선인과 러시아 정부의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는 35쪽짜리 문서를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열흘 전이었다. 문서를 작성한 영국 정보기관(MI6) 스파이 출신 크리스토퍼 스틸이 민주당 지도부의 의뢰를 받아 작성한, 이른바 ‘스틸 문서(Steele Dossier)’였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2016년 미 대선 내내 트럼프와 러시아 간 미 대선 ‘공모’ 여부가 주목이었는데, 스틸 문서는 “러시아 정권은 서방을 분열하기 위해, 최소 5년간 푸틴의 승인 하에 트럼프를 육성하고 지지했다” “트럼프는 2018년 오바마 대통령이 전에 묵었던 모스크바의 리츠칼튼 호텔 방 침대에서 그를 욕보이려고 창녀들을 불러 자신이 보는 앞에서 ‘황금샤워(오줌 누기)’를 하게 했다” “이 호텔은 마이크와 카메라로 모든 것을 녹화할 수 있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통제 하에 있어, FSB는 트럼프의 약점을 쥐게 됐다”…. 트럼프가 러시아와 대선 공모를 한 것은 물론이고 난잡한 섹스파티까지 해, 이제 미 대통령에 취임할 사람이 러시아 정보당국에게 약점을 잡히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트럼프가 오바마가 묵었던 모스크바 호텔 방에서, 러시아 창녀들과 소변 파티를 벌였다는 내용을 담은 스틸 문서/버즈피드 웹사이트

◇미 언론, 대대적 보도에 민주당 “수사하라” 요구 빗발

이 문서가 나오자, 인터넷 매체들은 물론이고 CNN 방송과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 거의 모든 언론 매체가 보도해 전 세계로 퍼졌다. 사실 확인이 극히 힘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MSNBC의 한 유명 앵커는 “이 문서의 여러 내용은 여전히 진위가 판명되지 않았지만, 어느 것도 공개적으로 부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거짓이라고 판명되지 않았으니, 믿을 만하다는 식이었다. 민주당에선 트럼프와 러시아의 연결성을 수사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트럼프가 2018년 7월16일 헬싱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만난 것도 이 ‘스틸 문서’의 신빙성을 높였다. ‘푸틴이 트럼프의 결정적인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무성했다. 푸틴과 러시아 정보당국은 정적(政敵)에 대해 각종 추문을 수집해 협박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콤프로마트(kompromat)’에 능하다.

◇특검과 소송에서 스틸 문서 신뢰성 잃어

그러나 이후 미 법무부 특검과 두 차례 관련 소송에서 ‘공모’ ‘소변 섹스 파티’ 등 이 문서의 주요 내용은 모두 신뢰성을 잃었다. 러시아 측 인사들이 “힐러리 클린턴에 큰 타격이 될 정보를 주겠다”며 수차례 트럼프 주니어를 비롯해 클린턴 측 캠프 인사들에 접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모’는 없었다. 또 2019년 12월 특검 조사에서, 스틸에게 이 정보를 제공한 이고르 단셴코(49)는 미 연방수사국(FBI)에 계속 횡설수설하며 “여기저기서 맥주 마시며 들은 소문”이라고 소스(source)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밝혀진 소스는 힐러리 클린턴 집안과 오랜 정치적 인연이 있는 찰스 돌런(71)이란 사람이었다. 스틸에게 ‘러시아 공모’ 정보를 준 단셴코는 허위 증언으로 기소됐다. MI6 전직 요원 스틸이 애초 자신이 이 정보를 받았다고 주장한 트럼프의 ‘부동산 파트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 언론사들에 심판의 날”

미 주요 언론사들은 그동안 미 법무부 특검과 소송에서 이 문서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것은 계속 보도했지만, 기존 보도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12일 워싱턴포스트가 처음으로 “언론사가 (보도 이후) 4년이 지나서 출판한 것을 완전히 수정해서 새로 편집한 기사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다”이라며 과거 보도가 근거가 없음을 시인한 것이다.

스틸 문서가 공개된 뒤, 영국 정보기관 MI6 출신인 크리스토퍼 스틸(맨왼쪽)을 "신뢰할 만한 인물"로 소개한 CNN 당시 보도 화면/CNN 스크린샷

워싱턴포스트뿐 아니라, ‘스틸 문서’의 존재를 최초로 알렸던 좌파 매체 ‘마더 존스’, ABC 방송과 CNN 방송,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매체들도 ‘사과’ 또는 ‘기사 오류’ 시인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게 됐다. 인터넷 매체 액시오스는 14일 “언론의 처참한 실패(epic fail)”라고 평했다. 컬럼비아저널리즘리뷰는 “미 언론에 심판의 순간이 왔다”고 했다. 그러나 CNN 방송은 19일 “우리는 스틸 문서를 최초로 알았지만, 처음엔 상세히 보도하지 않았다”며 어떠한 오류도 시인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전했을 뿐이라는 변명이었다.

◇스틸 문서 확인 안하고 왜 보도했을까

주요 언론사 중에서 이 ‘스틸 문서’ 파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곳은 뉴욕타임스(NYT)뿐이다. NYT는 자체 확인이 불가능하자, 이 문서 내용을 자세히 보도하지 않았다. NYT는 그때 “잠시 그 소변 문서를 추적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허구이거나 개연성이 낮아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주요 매체들은 왜 이렇게 스틸 문서에 매달렸을까. 17일 컬럼비아저널리즘리뷰(CJR)와 15일 NYT의 분석은 이렇다.

우선 당시 정황에 비춰 볼 때, 스틸 문서가 그럴 듯했다. 트럼프가 사업상 오랫동안 러시아에 구애한 것과 러시아가 미 민주당 지도부의 이메일을 해킹하고 소셜미디어에 왜곡 정보를 퍼뜨리며 미 대선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다 보니, 이 문서도 ‘사실이어야’ 했다.

또 트럼프를 싫어했던 기자들은 포르노배우와의 혼외정사를 비롯해 사실로 드러난 그의 여러 성적 비행(非行)과 이 문서의 ‘소변파티’를 연결지었다. 당시 애틀랜틱 몬슬리는 “트럼프가 러시아에 가서 창녀들과 이런 성적 탈선을 했으리라는 것이 갈수록 신빙성이 높아진다”고 평했다.

게다가 트럼프는 기자들과 언론사들을 “가짜 뉴스” “망할 언론사” “과장보도 사기꾼” 등으로 늘 공격했다. NYT는 “완벽한 세상이라면 언론은 자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공정하게 보도해야 하지만, 세상은 완벽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로 스틸 문서를 의심스럽게 생각한 많은 기자 중 누구도, 허위를 파헤쳐 트럼프와 그 측근들을 돕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스틸 문서가 공개된 다음날 바로 “이건 모두 가짜뉴스다.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사안에서 많은 거짓말을 했다. NYT는 “거짓말쟁이가 ‘이건 거짓’이라고 얘기했을 때에, 사람들은 ‘이 역시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팩트체크 서비스는 트럼프의 주장 3만 건을 ‘거짓’으로 판명했었다.

최초로 스틸 문서를 인터넷에 공개한 버즈피드의 당시 편집인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때는 인터넷 매체들이 다소 느슨한 기준으로 보도했던 것을 열심히 받아 보도하던 미 주류 언론사들이 이제 와서 시체가 된 문서 주변에서 위선적인 춤을 추며 인터넷 매체에 ‘쯧쯧’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CJR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인 카일 포프는 “트럼프처럼 언론도 극단으로 치우쳤다”며 “옳은 위치는 늘 그 중간의 혼란스러운 공간에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