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이 북한의 인권 침해를 이유로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첫 대북 독자 제재를 발표했다. 월리 아데예모 미 재무부 부장관은 10일(현지 시각) “국제 인권의 날을 맞아 재무부는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지른 이들을 찾아내 책임을 묻기 위해 주어진 도구를 사용한다”며 중국, 북한, 미얀마, 방글라데시의 개인 15명과 단체 10곳을 제재한다고 밝혔다. 북한에서는 불공정한 사법 제도 및 유엔 대북 제재 위반을 이유로 리영길 국방상과 중앙검찰소, 4·26아동영화촬영소가 제재 대상에 올랐다. 비핵화 문제에서는 북한에 전제 조건 없이 만나자는 제안을 던졌지만, 인권 원칙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 재무부는 북한 중앙검찰소가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을 통해 개인들의 정치적 잘못을 기소·처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많은 정치범이 국가보위성이나 사회안전성이 운영하는 수용소에 가게 된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지난 7월 국방상이 되기 전까지 사회안전상을 지낸 리영길을 제재했다. 국가보위성을 이끄는 정경택 국가보위상은 지난 2018년부터 미국 재무부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유럽연합(EU)도 지난 3월 인권 유린 혐의로 중앙검찰소와 리영길, 정경택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중앙검찰소와 리영길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면서 미국 재무부는 2015년 말 북한 여행 중 당국에 억류됐다가 숨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언급했다. 재무부는 “2016년 체포된 미국인 수감자 오토 웜비어와 여전히 북한에 구금돼 있는 다른 외국 수감자들 같은 외국인들도 북한의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사법 체계의 희생양이 됐다”고 했다. 또 “살아 있었다면 올해 27세가 됐을 오토 웜비어가 받은 대우와 궁극적 사망은 비난받아야 한다. 이런 최악의 인권 기록에 대해 계속해서 북한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북한 정권이 노동자를 해외에 보내 가혹한 환경과 감시 속에 핵, 탄도미사일 개발에 쓸 외화 벌이를 시키고 있다며 관련 단체와 개인을 무더기 제재했다. 2017년 12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2397호는 북한의 해외 노동자 송출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유엔 회원국이 자국 내 북한 근로자를 2년 내로 북한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번 재무부 제재 대상에 오른 러시아 대학 ‘유러피안 인스티튜트 저스토’와 유레비치 소인 학장은 이런 유엔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북한 건설 노동자들이 유학생 비자를 받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미국 독자 제재 대상이 되면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금융기관이 소유·통제하는 개인이나 단체와의 거래가 금지된다.
지난 2002년 국내 인기 만화 ‘뽀롱뽀롱 뽀로로’의 첫 시즌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국영 ‘4·26아동영화촬영소’도 미국 재무부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뽀로로’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한국 업체가 북한에 하청을 맡기는 형태의 남북 합작으로 4·26아동영화촬영소와 함께 만들었다. 이 촬영소의 중국 내 위장회사 격인 충칭시 닝스 카툰, 상하이 훙만 카툰 앤드 애니메이션, 상하이 모싱 카툰과 그 관계자 루허정도 제재했다. 미 재무부는 “불합리한 저임금에 이끌려 외국 기업들이 계속해서 이 촬영소에 애니메이션 일의 하청을 주고 있다. 촬영소는 북한 정권을 겨냥하는 제재를 회피하고 국제금융기관을 속이려고 여러 위장 회사를 이용했다”고 했다.
선전을 중시하는 북한 체제 특성상 만화영화 제작은 줄곧 정권 차원의 관심사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외국에서 원화 제작 하청을 받아 외화벌이에도 나섰다. 지난 2014년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4·26아동영화촬영소를 방문해 “야심을 가지고 조선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만화영화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작년 11월에도 평양 중구역에 있는 이 촬영소 벽에 ‘명작만화영화 창작 성과로 80일 전투의 위대한 승리를!’이란 구호가 붙어 있는 사진이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실렸다.
한편 미 재무부는 인공지능(AI) 컴퓨터 시스템에 수많은 위구르인들의 생체 정보를 기록해 감시와 인권 탄압에 이용했다는 이유로 쉐커라이디 짜커얼 신장위구르자치구 주석과 에르킨 투니야즈 부주석도 제재했다. 중국 최대의 AI 스타트업인 ‘센스타임’도 이를 도왔다며 투자 제한 대상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