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러시아의 고위급 회담을 앞두고 웬디 셔먼(왼쪽) 미 국무부 부장관과 세르게이 럅코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이 마주 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담판’이 9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됐다. 우크라이나의 명운을 놓고 미·러 전략안정대화(10일), 나토·러시아위원회(12일), 유럽안보협력기구(13일)로 이어지는 연쇄 회담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초반부터 양측에서 “돌파구를 기대하지 않는다”, “양보는 없을 것”이란 발언이 나오면서 타결에 상당한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미국이 대북 제재에 버금가는 제재를 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세르게이 럅코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9일 저녁 제네바에서 2시간 정도 만찬을 함께 했다. 10일 열린 ‘전략안정대화’를 앞두고 서로의 의향을 떠보는 탐색적 대화를 가진 것이다. 국무부는 셔먼 부장관이 “주권과 영토 안정, 주권 국가가 동맹을 선택할 자유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강조했다”며 “유럽 동맹 및 파트너들 없이 유럽의 안보를 논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용납할 수 없고, 나토 확장 금지 등의 요구도 수용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럅코프 차관은 만찬 후 기자들에게 “논의가 매우 훌륭했으며, 낙관할 근거가 있다”며 “미국이 타협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러시아 스푸트니크통신은 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의 요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회담이 단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강경 메시지’를 덧붙였다. 러시아 타스 통신에 따르면 그는 “안보 보장에 관한 합의에 도달 못 하면 병력을 추가 보강하고, 적국을 억제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럅코프 차관은 회담 전 “앞으로 회담에서 서방국가들이 끊임없이 만들어 낼 위협과 압박하에서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찬에 앞서 CNN에 출연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의 머리에 총이 겨눠져 있는데 어떤 진전이 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동·남·북쪽 국경에 10만 대군을 집결시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블링컨 장관은 “이번 주에 어떤 돌파구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중순 미국과 나토에 ‘나토 확장 금지’, ‘구소련 국가 내 주둔 금지’ 등을 요구하는 안보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그러나 서방 진영에서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의 핑계를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미국과 나토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협상 조건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에 대비한 강력한 제재안을 준비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미국이 “항공, 반도체나 다른 부품들에 사용되는 첨단 기술의 대러 수출 통제를 논의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컴퓨터나 다른 소비재 수출도 통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쿠바, 이란, 북한, 시리아에 대한 것만큼 엄중한 수출 통제를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치는 항공 전자기기부터 스마트폰, 게임 콘솔, 태블릿PC, 텔레비전 등 광범위한 제품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블룸버그통신은 “결정된 것은 없지만 이런 무역 제한이 미국의 대러 수출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산 제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에 가전제품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자국의 명운(命運)이 걸려 있는 연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는 큰 역할을 못하고 있다. 아직 나토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12일 나토·러시아 위원회에도 당사국으로 참가하지 못한다. 13일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회담이 있지만, 참여국이 무려 57개에 달하는 느슨한 ‘정부 간 협력 기구’에 가까워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비중 있게 다뤄지긴 어렵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놓고 “코미디언 출신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충분한 진지함이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탓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부 요직에 전문 관료가 아닌 방송·영화계 인사 36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