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 시각) 친러 반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루간스크주 마을의 유치원. 포탄이 떨어져 벽에 큰 구멍이 뚫리고 유리창이 박살 났다/ AFP 연합뉴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러시아 압박에 나섰다. 도발 계획을 국제사회에 노출해 김을 빼는 동시에, 러시아가 전쟁을 포기하더라도 “미국이 틀렸다”며 체면을 세울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는 고도의 외교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17일(현지 시각)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왼쪽 뒤에는 토마스 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7일 오전(현지 시각) 뉴욕 유엔 본부 안보리 회의장에 예정에 없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나타났다. 이날 회의는 2월 안보리 의장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주민을 탄압하는 전쟁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며 소집했다. ‘러시아가 안보리를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선전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보고를 받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날 뮌헨안보회의 참석차 독일로 향하던 블링컨 장관을 급히 뉴욕으로 보낸 것이다.

17일(현지시간) 포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동부 루간스크의 한 마을 주택에서 '휴전·전선 안정화 문제 감시 및 조정 공동센터'(JCCC) 관계자들이 주민과 함께 피해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은 이날 동부 돈바스(도네츠크, 루간스크주) 지역에서 포격을 주고받았으며, 양측은 서로 상대측이 선제공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생중계된 블링컨 장관의 10분 연설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의 예고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긴박하고 생생했다. 그는 “러시아가 며칠 내 우크라이나 공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미 정보 당국의 판단에 근거, 그 첫 단계로 러시아가 지어낼 법한 ‘공격 구실’ 여러 개를 나열했다. 블링컨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테러리스트가 러시아 영토 내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러시아계 주민의 시체 무덤이 발견됐다’거나, ‘우크라이나가 먼저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며 인종 청소와 대학살이라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언론이 이미 대중 분노를 자극하려 이런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의 돈바스 지역 내 ‘집단 학살’ 주장 가능성에 대해 “내 가족이 겪은 홀로코스트 경험 때문에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다”고 했다. 블링컨의 계부는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생존자다.

블링컨은 이어 “러시아 정부는 연극을 하듯 비상 회의를 소집해 ‘우크라이나 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대응한다’고 연출할 것”이라고 했다. 또 “러시아 미사일과 폭탄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떨어지고, 통신이 마비되며, 핵심 정부 기관은 사이버 공격을 당할 것”이라며 “러시아 탱크와 군인이 인구 280만이 있는 수도 키예프를 포함, 지도에 표기된 핵심 목표를 향할 것”이라고 했다.

블링컨은 “조건 달지 말고, 얼버무리지 말고, 왜곡하지 말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라”며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에게 다음 주 유럽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보력의 신뢰 훼손, 과장과 공포 조장이란 비난까지 모든 것을 내걸고 외교전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정부가 소련 핵미사일 사진을 미리 공개, 흐루쇼프와 막판 협상을 이룬 것과 비슷한 작전이란 것이다.

블링컨이 연설하는 동안 세르게이 베르쉬닌 러시아 외무차관은 당황한 듯 서류를 뒤적이는 척했다. 베르쉬닌은 “블링컨 장관의 발언은 유감스럽고 위험하다” “러시아군은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복귀하고 있다”고 했지만, 블링컨이 제시한 시나리오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들을 만나 “외교적 해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뮌헨안보회의에 참석, 서방 동맹들과의 긴밀한 협력에 나섰다. 한편 주러 미국 대사관에선 이인자인 바트 고먼 부대사가 러시아에서 추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