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 밤(현지 시각) 모스크바의 대통령궁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러시아 국기를 배경으로 앉아 “다라기예 드루지야(친애하는 친구 여러분)”란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이후 55분51초간 이어진 그의 대국민 연설은 미국이 “극도로 폭력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는 연설 초반부터 “우크라이나가 우리에게 그저 이웃 국가가 아니다”라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역사, 문화와 영적 공간의 빼앗길 수 없는 일부”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한 번도 진정한 국가의 지위를 가져본 적이 없다”며 현재의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꼭두각시들이 정권을 잡은 식민지”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친러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인구가 ‘대량 학살’에 직면해 있기에 러시아군을 투입해 “평화 유지 작전”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그리다 시모니테 리투아니아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푸틴은 방금 (유명 소설가인) 카프카와 오웰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독재자의 상상력엔 한계가 없고, 너무 뻔뻔해서 못할 거짓말도 없다”고 평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에서 러시아 담당 정보관을 역임한 앙겔라 스텐트 조지타운대 교수는 지난달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이런 푸틴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푸틴 독트린’으로 규정했다. “푸틴은 러시아, 중국, 인도, 미국 같은 소수의 강대국만 어떤 동맹을 맺고 끊을지 선택할 자유가 있는 절대적 주권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해왔다”며 “우크라이나나 조지아 같은 작은 나라들은 완전히 주권적이지 않으며 러시아의 제약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푸틴 독트린의 궁극적 목적을 “유럽, 일본, 미국이 촉진해 온 냉전 이후의 자유롭고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의 폐기”로 분석했다.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구 소련국가를 대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분쟁이 벌어지자 2000명의 평화유지군을 즉각 파견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벨라루스에서 대통령 부정 선거 논란이 발생하자 공수부대를 배치했다. 올 초 카자흐스탄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소속으로 파견된 러시아 공수부대(스페츠나츠)가 사태를 진압했다.
푸틴 독트린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슬로건으로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 회복을 천명한 바이든과 정면충돌하는 분위기다. 바이든은 지난해 취임 후, 현재 세계가 “민주주의와 독재의 싸움” 중이라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같은 ‘바이든 독트린’은 미국에서의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과 코로나 사태로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軸)이었다.
문제는 미국이 가진 수단이 제한적이라는 데 있다. 미군의 해외 파병에 부정적인 미 국내 여론,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 등으로 인해 군사적 개입은 검토조차 되고 있지 않다. 지난 5~8일 이코노미스트와 여론조사 회사 유고브가 미국 성인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5%는 미군을 우크라이나에 파병해 러시아군과 싸우게 하는 데 반대했다. 찬성은 13%뿐이었다.
이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는 작년 10월 러시아가 대규모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시킨 것을 확인한 이래 ‘심리전’과 ‘경제 제재 위협’을 통해 러시아를 억지하려고 애써왔다. 미 당국자들은 러시아가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가짜 깃발 작전(자작극)’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 등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우크라이나 침공 시 “금융 제재와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 등으로 러시아는 외국 자본과 기술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하지만 이날 푸틴 대통령의 연설 뒤 백악관은 그간 경고해 온 광범위한 제재 대신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공화국 두 곳에 대한 제재만 발표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제한적 제재는 그간 미국과 유럽동맹들이 부과하겠다고 말해 온 더 공격적인 제재를 유보하고 외교적 해법의 희미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비공개 국가안보회의를 열었다고 밝혔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공개 연설 등은 없었다.
푸틴을 억지하지 못하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은 약하다’는 공화당의 공세가 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지난달 중순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회 공화당 간사가 “(바이든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러시아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힘이 아니라 약함을 투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공화당 일각에서는 이미 우크라이나 사태를 ‘외교 정책 실패’로 규정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