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고 AP통신 등이 23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향년 84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미·소 냉전 종식 시점부터 2001년 9·11 테러 발생 즈음인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외교·안보 정책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클린턴 행정부 1기(1993~1997) 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맡았고, 2기(1997~2001년) 임기 때는 미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외교 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장관에 올랐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2000년 10월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난 올브라이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으로 피난했다가 전후로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자 195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59년 웰슬리 칼리지를 우등 졸업해 정치학 학사를 받은 뒤 언론 재벌 올브라이트 가문의 조셉 메딜 패터슨 올브라이트와 결혼했다. 한동안 가정 주부로 생활한 올브라이트는 세 딸을 양육하면서도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입학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후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의 입법담당 수석고문을 지냈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백악관 NSC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보좌하기도 했다. 이후 유엔대사, 국무장관 등 고위직을 지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을 옹호하고 발칸반도의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동맹의 개입을 촉구해온 인사로 통한다. 또 핵무기 확산 억제를 추구하며 전 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한 비핵화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2000년 10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방미한 조명록과 논의 끝에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었다. 직후에 그는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금수산 기념궁전(옛 주석궁)에 있는 김일성 주석의 묘를 참배했었다. 다만 올브라이트 장관의 참배 장면은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올브라이트는 추후 자신의 자서전 ‘마담 세크러터리’에서 “세계에는 북한보다 더 가난한 곳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정신의 자발성이 그보다 철저하게 압살된 곳은 없었다”라며 “외교상으로 필수적인 듯했으므로 나는 이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묘를 찾았지만 추모에 어떤 경의도 바칠 수 없었다”고 했다.

국무장관 시절 그는 ‘브로치 정치’로도 유명했다. 성조기나 독수리 브로치로 미국의 강인함을 과시했었고, 때로는 비둘기 브로치로 평화에 대한 염원을 표현했다. 평양 방문때 올브라이트는 성조기 배지를 제일 큰 것으로 달기도 했다.

퇴임 후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 브로치를 달게 된 것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 후세인은 당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맡고 있던 올브라이트를 가리켜 “사악한 뱀 같은 여자”라고 비판했었다.

이에 올브라이트는 아예 뱀 모양 브로치를 달고 유엔 안보리에 참가해 후세인의 비판에 대한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상황에 맞는 브로치를 달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협상 결과를 묻는 기자들에게 ‘내 브로치를 읽어라’라고 했다.

러시아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협상을 벌일 때는 화살 모양의 브로치를 달기도 했다. 러시아 외교장관이 “그게 당신들의 요격미사일 중 하나냐”고 묻자 올브라이트는 “맞다. 우리는 이렇게 작게 만든다”고 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지난달 26일 미국 MSNBC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의 “역사적인 잘못”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