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 동맹들이 러시아와 공존·협력을 포기하고, 장기적으로 러시아를 고립·약화시키는 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17일(현지 시각) 미국은 물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 동맹국들이 “국방부터 금융, 무역, 외교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태도와 관련된 거의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정책을 담은 청사진을 그려보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폴란드를 방문하며 푸틴에 대해 “이 자가 권좌에 남아있어선 안 된다”고 강도 높게 발언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13일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를 더 깊은 경제적, 재정적, 전략적 고립으로 밀어 넣기 위해 파트너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U 고위 외교관은 워싱턴포스트에 “우리가 정권 교체를 말하지는 않는다”면서도 “지금처럼 행동하는 푸틴과 안정적으로 가는 시나리오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나토의 전략이 수정될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출범 초기만 하더라도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중산층을 위한 정책’과 ‘중국과 경쟁’ 두 가지에만 집중할 태세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지난달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국방 전략 기밀 보고서에는 ‘유럽에서 러시아의 도전을 억지하는 것’이 우선 대응해야 할 과제 중 하나로 언급됐다. 현재 작성 중인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 안보 전략’에도 러시아 문제가 반영될 전망이다.
나토 각국이 국방 예산 증액을 발표하고,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늘린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포린폴리시는 15일 “우크라이나군이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 가운데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이 탱크와 헬리콥터, 중화기 등 지원을 늘렸다”며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에) 중화기 지원을 자제하던 전쟁 초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보도했다.
나토 자체의 확장도 예상된다. 핀란드 외교부의 투티 투푸라이넨 유럽 담당 장관은 15일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여론조사를 보면) 핀란드인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다”며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핀란드의 나토 가입 신청)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나토 가입에 반대했던 스웨덴의 집권 여당 사회민주노동자당도 지난 11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춰 국제 안보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미국의 의회 전문 매체 ‘더 힐’은 16일 “러시아가 핀란드와 스웨덴을 나토의 품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평가했다.
나토는 오는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에서 지난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수정된 전략 개념을 담은 문건을 공개할 예정이다. 2010년 전략 개념에는 러시아와 ‘진정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 전략이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8일 미 공영 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와 나토·서방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우리가 수년 동안 러시아와 해보려고 시도했던 의미 있는 대화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했다.
경제 관계도 조정이 시작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8일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대한 무역 특혜를 박탈하고,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 두 건에 서명했다. 미국 의회는 전날 이 두 건의 법안을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했다. EU 회원국들도 오는 8월 중순부터 러시아산 석탄 수입을 전면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앞서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8일 가스 공급원 다양화, 재생 에너지 도입 가속화, 난방과 발전 방식의 변경 등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려는 계획(REPowerEU)을 마련했다. EU 집행위원회는 “2030년 이전에 유럽이 러시아산 화석연료에서 독립하게 하는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연말까지 유럽의 러시아산 가스 수요를 3분의 2로 줄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