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이 반세기 가까이 미국에서 임신중지(낙태)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온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기각하려는 대법원의 다수 의견서 초안이 유출되면서 3일(현지 시각) 미 전역이 뒤집혔다. 대법원의 결정문 초안 전체가 유출된 것은 유래가 없는데다가, 정치 이념에 따라 첨예하게 갈리는 낙태 문제를 다루고 있어 파문이 장기화 될 조짐이다.
여성 인권단체들은 대법원 보수 판사들에 대한 반대 집회를 시작했고,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자신 명의의 성명을 내고 우려 의견을 냈다. 공화당은 “유출자를 철저히 조사해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했고, 존 로버츠 대법원장도 이날 “(신뢰의) 터무니 없는 위반”이라며 수사 의뢰 방침을 밝혔다.
앞서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전날 사무엘 알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낙태 권리 관련 판결 다수의견 초안을 입수해 세부 내용을 보도했다. 알리토 대법관은 98쪽에 달하는 다수의견 초안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며 “(이제) 헌법에 귀를 기울이고, 낙태 문제를 국민이 선출한 대표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했다.
미국에서의 낙태 합법화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이뤄졌다. 이 판결은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임신 22~24주 이전까지 임신중절을 허용하도록 했다. 이후 연방대법원은 1992년 ‘케이시 판결’이라 불리는 판결에서 낙태 합법화 원칙은 유지하면서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여성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각 주 정부가 임신중절 규제 조항을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미시시피주는 낙태 금지 기준을 임신 20주 후에서 임신 15주까지로 앞당겼고, 심각한 태아 기형 등을 제외한 모든 낙태를 금지했다. 또한 산모를 구하기 위해 낙태를 시술한 의사도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낙태 클리닉 업체 ‘잭슨여성보건기구’는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법 시행에 제동을 걸었다. 연방대법원은 현재 미시시피주의 법률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리는 심리를 진행 중이며, 오는 6월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전망된다. 다수의견 초안에 의견을 밝힌 대법관의 명단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대법원 구성이 보수 6, 진보 3인만큼 연방대법원 최종 판결에서도 이 구도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문건에 대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일 성명을 내고 “여성의 선택권은 근본적이고, 로 대 웨이드는 거의 50년간 이 땅의 모든 법이었다”라며 “기본적인 공정과 우리 법의 안정성은 이를(로 앤 웨이드 판결) 뒤집지 말라고 요구한다”라고 했다. 이어 만약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다면, 모든 선출직 공직자는 여성의 권리를 지켜야만 하고 유권자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이를 옹호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미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 쪽을 옹호하는 입장을 내는 것은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의 공동 성명에서 “대법원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에게 50년래 가장 큰 권리 제약을 가하려 한다. 로 대 웨이드를 뒤집으려는 공화당 임명 판사의 표결은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