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대통령, 빈 살만 왕세자.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국은 양국 관계를 재설정(reset)할 준비가 돼있다”는 뜻을 전했다고 CNN이 10일(현지 시각) 익명의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양국 관계를 경색시킨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에 대해 사우디 왕실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하지 않고 이쯤에서 덮겠다는 의미다. 한 미국 고위 당국자는 CNN에 “(미국과 사우디) 양측은 중동의 평화와 안정을 이루기 위해 그 사건을 넘어서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사우디 측도 “카슈끄지 사건은 종결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미국 측에 분명히 했다고 이 방송은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바이든 행정부는 이것이 “용서나 망각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 사우디를 방문해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를 만나면 수위는 낮더라도 직접 카슈끄지 문제를 제기할 계획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와 대면한다는 것 자체로 ‘인권 옹호’란 도덕적 원칙 대신 급등하는 국제 유가를 진정시키고 중·러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타협을 선택했다는 평가가 나올 전망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일 “(사우디 방문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백악관이 이르면 13일 바이든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을 발표할 것”이라고 2명의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1940년 수교 이래 미국과 사우디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이었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2018년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납치·피살되고, 빈 살만 왕세자가 배후로 지목된 것이 양국 관계의 걸림돌이 돼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019년 “그들(사우디)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따돌림받는 신세(pariah)로 만들겠다”며 “현 사우디 정부에는 (카슈끄지 사건을) 벌충할 만한 사회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인 지난해 2월 일부 미국 무기의 대사우디 수출을 중단하도록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극진히 대접했던 빈 살만 왕세자와의 대면도 피하고, 그의 부친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과만 통화했다.

하지만 코로나 대유행이 잦아들고 원유 수요가 회복된 지난해부터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작년 9월 사우디를 방문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 석유 증산을 요청했다. 지난 4월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빈 살만 왕세자는 이 면담에서 설리번 보좌관에게 고성을 지르며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다시는 논의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이후 “석유 증산 요청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국제 유가가 더욱 급등하면서 미국은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거듭 간청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3~4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잇따라 통화하며 이들과 관계를 확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였던 사우디가 중·러 쪽에 설 가능성이 제기되자 미국 내에서도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CNN 진행자이자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미국 저명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지난 4월 워싱턴포스트에 “국제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유가를 떨어뜨리는 것밖에 없다”며 “그 길은 빈 살만과의 화해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럼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나는 이런 주장을 가볍게 하지 않는다. 자말 카슈끄지는 내 친구였다. 나는 지금도 그가 그립다”면서도 “그러나 현실은 MBS(빈 살만 왕세자)가 앞으로 50년간 사우디를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적 통치자이며 사우디 젊은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고 했다.

냉전 시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마오쩌둥의 중국과도 연대해야 했던 것처럼 러시아와의 신냉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빈 살만 왕세자의 사우디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설에 인권 단체는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