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들어 미국 언론에서는 ‘워터게이트 보도 50주년(50th Watergate anniversary)’ 특집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세상을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 첫 보도가 ‘1972년 6월 17일’ 이뤄진 걸 기념해서죠.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Associate Editor)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워터게이트 추적 보도 모습을 담은 1976년 상영 영화 <All the President’s Men> 장면. 로버트 레드포와 더스틴 호프먼이 주인공을 맡았다./Commonsensemedia

◇1972년 6월 17일...워터게이트 사건 발생

그날 새벽 2시30분쯤 워싱턴DC 케네디센터 옆 워터게이트 빌딩(Watergate complex)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Democratic National Committee)에 침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다섯 명이 경찰에 체포된 게 발단이었어요.

처음엔 평범한 단순 절도로 보였던 이 사건은 입사 9개월차 신참 기자인 밥 우드워드(Bob Wodward·1943~)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1944~)을 필두로 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의 노력으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하야(下野) 사태를 낳았죠.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는, 한 해 전인 1971년 뉴욕타임스(NYT)가 특종보도한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일명 펜타곤페이퍼 Pentagon Paper) 폭로 보도와 더불어 ‘독립 언론’의 가치와 중요성을 전 세계에 알린 ‘금자탑’ 같은 일이예요.

특히 매일 마감시간에 쫓겨 속보로 지면을 채우던 미국 언론계에 큰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이 활발해지는 분수령이 됐죠.

당시 포스트의 편집인인 벤저민 브래들리(Bradlee·1921~2014)와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Graham·1917~2001) 여사의 역할도 주목되요. 브래들리는 예민한 기사를 냉철하게 다루며 전체 흐름을 잘 조율했고, 그레이엄은 회사 몰락이라는 최악 사태를 각오하고 기자들을 보호하며 외풍에 맞서 발행인(Publisher)의 전범(典範)을 보여줬어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을 하야시킨‘워터게이트 사건’특종을 지휘했던 벤저민 브래들리(오른쪽 끝)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이 1973년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의 두 주인공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즈 편집국장/조선일보DB

이 때문인지 ‘워터게이트 보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과 열기는 상상 이상으로 뜨겁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 <All the President’s Men>가 1976년 상영된 게 대표적이예요. 로버트 레드포드(밥 우드워드 역)와 더스틴 호프먼(칼 번스타인 역)이 영화 주인공으로 열연했죠.

마이클 셔드슨(Schudson) 교수의 20주년 기념 연구서를 비롯해 많은 연구논문과 단행본이 나왔고, 올해 50주년에도 특집 기사와 행사들이 잇따르고 있죠. 워싱턴포스트는 이달 6일부터 17일까지 12일 동안 특집 기사(special coverage)를 싣고 있어요.

마이클 셔드슨 미국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 교수가 워터케이트 보도 20주년인 1992년에 출간한 책/Amazon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보도 50주년' 로고

◇첩보 영화 뺨치는...‘딥 스로트’ 접촉

워터게이트 보도에서 ‘약방의 감초’를 빼놓을 수는 없지요. 우드워드 기자에게 비밀 제보를 한 ‘딥 스로트(Deep Throat·내부 고발자)’로 불리는 고위 정보원 얘기예요. 사건 발생으로부터 34년 후인 2005년에 공개된 주인공은 당시 미국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던 윌리엄 마크 펠트(Felt·1913~2008)였어요.

우드워드는 해군 장교 시절 백악관에 갔다가 펠트를 우연히 처음 만났다고 해요. 두 사람은 워싱턴 DC 소재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동문(同門)이기도 해 자연스레 친해졌는데, 펠트는 우드워드에게 중앙일간지로 가라고 조언했다고 해요.

딥 스로트(펠트)가 우드워드에게 비밀 정보를 제공하는 과정은 첩보영화를 뺨쳐요. 우드워드는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아파트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주차장에서 다음날 새벽 2시에 만났어요. 심야에 만날 때도 미행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수법을 동원했어요. 우드워드의 증언이예요.

“나는 6층 아파트에서 뒤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골목길로 들어섰다. 주차장 건물까지 가는데 걷기도 하고 택시를 두 번 이상 갈아타고 나서야 아무도 미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와 딥 스로트는 주차장 건물에서 눈에 띠지 않게 한 시간 혹은 그 이상 동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원제 All the President’s Men)>, 113쪽)

1972년 6월17일 새벽 2시30분쯤 '워터게이트 건물'의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난입했다가 체포된 5명의 괴한 기사가 첫번째 워터게이트 보도였다. 워싱턴 DC 포토맥강변의 워터게이트 건물 모습

“가끔 늦은 밤에 만날 때 택시 잡기가 어려우면 나(우드워드)는 2시간 정도를 걸어서 주차장 건물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이 되어도 상대가 나타나지 않은 적도 두 번 있었다. 한밤중에 지하 주차장에서 한 시간 이상 혼자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한번은 그가 미행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책, 113~114쪽)

워터게이트 사건이 처음 터졌을 당시,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모두 첫번째 결혼에 실패해 독신(獨身)으로 있었어요. 여기에다 ‘토요일 새벽 발생 사건’이다 보니, 사회부에서 가장 신참인 두 기자가 취재를 배당받은 거죠. 당시 우드워드는 29세, 번스타인은 28세였어요.

예일대를 졸업한 우드워드는 ROTC 해군 장교로 제대했구요, 16세 때 ‘워싱턴스타’ 신문의 사무보조원으로 시작한 번스타인은 대학 중퇴 학력에 우드워드 보다 워싱턴포스트에 10개월 먼저 입사했어요. 두 사람은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8월까지 3년 여 동안 이 사건에만 매달렸어요.

대특종을 낚은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어요. 올해 만 79세인 우드워드는 워싱턴포스트에 줄곧 근무해 지금은 부편집인(Associate Editor)이예요. 이는 원로 기자에 대한 예우 차원의 직책일 뿐, 정기적으로 하는 일은 없다고 해요. 저술 작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회사 요청이 있을 때 아주 드물게 기고를 하는 정도예요.

번스타인은 1977년 워싱턴포스트를 떠나 ABC방송 워싱턴지국장 등으로 일했고 강연과 기고,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어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사임 사실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1974년 8월9일자 A1면

◇60세 이후 10권 집필...전국 1위 단행본만 14권

흥미로운 건 밥 우드워드 기자의 파워와 명성이예요. 그의 상관으로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과 편집인을 지낸 벤 브래들리는 1995년 자서전 <A Good Life> 서문에서 우드워드를 이렇게 평했어요.

“나의 인생과 내가 몸담은 언론사에 대해 밥 우드워드라는 특별한 기자가 이바지한 공로를 과대평가하기는 매우 힘들다. 우드워드는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에 관한 한 그의 세대에서 최고였고, 내가 본 기자들 가운데서도 최고였다.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 이후에도 언론계 사다리의 최고 정점에서 과거와 같은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Ben Bradlee, A Good Life <Simon and Schuster, 1995> 12~13쪽)

위클리 스탠더드(The Weekly Standard)는 우드워드를 가리켜 “그의 세대에서 가장 순수한 기자이다”고 했구요. 2003년 월스트리트저널의 앨버트 헌트(Albert Hunt) 기자는 “우드워드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언론인(the most celebrated journalist of our age)”이라고 극찬했어요.

밥 우드워드(맨 오른쪽)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2019년 12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있다. 책상에는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이 같이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백악관 제공

우드워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칼럼이나 일반 기사 보다 그가 쓴 책 덕분이 큽니다. 칼 번스타인과 같이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취재 과정의 전모를 다룬 책 <대통령의 모든 사람들>(1974년)을 시작으로 작년 9월 낸 <Peril>까지 그는 총 21권의 책을 냈어요.

이 책들은 거의 예외없이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14개는 전국 베스트셀러 1위(No.1 national nonfiction bestseller)에 올랐어요. 이는 현대 미국을 통틀어 모든 논픽션작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적이라고 해요.

일례로 2018년 나온 도널드 트럼프을 해부한 <Fear>(공포)는 출간 첫 주에만 110만부가 팔려 출판 도서 집계 시작 94년 만에 ‘첫 한 주간(週間)’ 최고 판매 기록을 세웠죠. 발간 첫날에만 75만부가 팔렸어요. 트럼프 대통령은 우드워드가 <Fear>를 집필할 때에는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2020년 출간된 <Rage> 때에는 전화통화를 비롯해 모두 18차례 직접 인터뷰에 응했어요.

2018년 9월 11일(현지 시각) 출간된 밥 우드워드의 신간 <FEAR>가 워싱턴DC의 한 서점에 쌓여 있다. 출판사인 '사이먼앤슈스터(Simon & Schuster)'는 책 출간 전부터 100만권 가까운 주문을 받았다고 밝혔다./조선일보DB

언론을 상대하지 않기로 유명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우드워드 기자를 1년에 세 번 독대했으며, 우드워드가 클린턴 행정부 내부 이야기를 쓴 <The Agenda>(1994년)를 준비하던 시절에는 백악관 직원들이 줄을 서서 만났다고 해요.

우드워드는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공작을 파헤친 <VEIL>, 미 국방부 내부를 다룬 <Commanders>, 연방대법원을 분석한 <Brethren>,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준(FRB) 이사장을 다룬 <Maestro>(2000년)도 냈어요. 그는 특히 만60세 이후 지금(79세)까지 10권의 책을 냈어요. ‘2년에 1권 꼴’인 셈이지요.

백악관, 연방대법원, 국방부 등 미국의 핵심 정부 기구를 심층취재한 책을 차례로 내놓은 언론인은 우드워드가 유일해요. 그러다 보니 “우드워드는 워싱턴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드워드의 책을 읽고서야 워싱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핵심은 ‘인내심’...“떠들지 않고 경청”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저술은 우드워드가 현장에서 ‘발품’을 팔아 취재한 땀과 노력의 결정(結晶)이라는 점이예요. 워싱턴포스트에서 편집국장이나 편집인 같은 직위를 맡지는 않았지만, 현장 저널리스트로서 대단한 성취를 이룬 거죠.

그의 저술들은 흠잡을데 없고(meticulous), 세부사실(details)에 충실한 걸로 정평 나 있어요. 대부분 내부 메모와 비밀해제 문서, 면담 기록(internal memos, classified documents, meeting notes), 대통령을 포함한 핵심 인사들에 대한 수백시간의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작성됐어요.

워싱턴포스트 컬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드렐르(David Von Drehle)는 2018년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 대통령들의 백악관 웨스트윙 생활에 대한 밥 우드워드의 탐구 노력은 대통령 연구학자인 테어도르 화이트(Theodore White)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 연구와 맞먹는다. 우드워드는 연방대법원과 국방부, CIA,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까지 섭렵해오고 있다.”

CIA의 비밀공작을 파헤친 밥 우드워드의 1987년 저서 <VEIL>
밥 우드워드가 2018년부터 2021년까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쓴 책 세 권

우드워드는 리처드 닉슨 이후 9명의 대통령을 직접 만나거나 취재했어요. 그러다 보니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한 번씩은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가지는 게 관례처럼 굳어졌죠.

그렇다면 우드워드가 품고 있는 ‘생각의 중심(中心)’은 뭘까요? 2019년 9월26일 서울에서 열린 언론포럼에 참석한 우드워드의 육성을 찾아봤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더군요.

“기자는 공격적이어야 한다. 권력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시민이 위탁한 것임을 백악관의 권력자들이 잊지 않도록, 기자는 지속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켜줄 정도의 공격성을 유지해야 한다.”

좋은 기자의 핵심 품성으로 그는 인내심(patience)과 공격적 취재(aggressiveness)를 꼽았어요. 인내심은 취재의 초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노력을 뜻하는데, “좋은 보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Good reporting makes difference)”는 믿음을 잊지 말라고 그는 당부했어요.

“저널리즘이 정권의 잘못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권력의 남용 등을 계속 감시하면 민주주의가 무너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지속적 보도를 통한 권력 감시의 압력이 중요하다. 언론의 역할은 그러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미국 CBS방송의 일요 대담 프로그램 'Face the Nation'에 출연한 밥 우드워드

2018년 4월27일 오클라호마시티 커뮤니티칼리지(OCCC)에서 행한 연설에서 우드워드는 자신의 취재 방법 세 가지를 공개했어요.

첫째는 사무실에서 전화나 인터넷으로 취재하지 말고 취재원을 직접 찾아가 만나려 최선을 다한다는 원칙이예요. 취재원의 눈앞에 나타나야, 기자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죠.

두 번째는 ‘떠들지 말고 듣기에 집중하라’예요. 그는 취재원을 만나면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킨다고 했어요. 그러면 취재원쪽에서 먼저 어색함을 깨기위해 말문을 연다고 합니다. 우드워드는 “하고 싶은 말을 참기 위해 자신의 새끼손톱을 엄지로 누르는 습관을 만들기도 했다”고 털어놓았어요.

마지막 원칙으로 그는 워터게이트 이후 정부의 비밀주의(secretive government)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어요. 권력자들이 비밀주의를 통해 권력을 사유화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걸 막겠다는 다짐이예요.

◇“평생 직업으로서 記者...새로운 발상 필요”

박건식 MBC PD는 <월간 신문과 방송> 2020년 3월호에서 우드워드 기자의 경쟁력을 이렇게 분석했어요.

“나는 2009년 미국 탐사보도 총회에서 밥 우드워드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우드워드)는 운집한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시 대통령과 4~5시간 단독인터뷰를 하면서 몇 개의 질문을 던졌을 것 같은가?’ 어떤 기자는 10개, 또 다른 기자는 20개쯤이라고 했다.

우드워드는 스스로 ‘나는 부시에게 500개의 질문을 던졌고 그래서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답했다. 500여 개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까? 29세 때 이룩한 워터게이트 특종기자란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하게 자신을 연마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력이 오늘날 밥 우드워드의 명성을 가져온 것이다.”

우드워드가 등장하는 동영상들을 보면 그의 말투는 느리고, 발음은 또렷해요. 그는 인터뷰에서 항상 예의바르면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선지 “우드워드를 만나면 원래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나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고 취재원들은 입을 모읍니다.

워싱턴포스트는 2021년에 입사 50주년을 맞은 밥 우드워드를 기념해 특집인터뷰 등을 실었다./WashingtonPost

궁금증은 우리나라에선 ‘밥 우드워드 같은 기자’를 언제,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로 이어집니다. 이재경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명예교수는 “기자(記者)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한국 기자의 자질이나 지적(知的) 수준은 미국 기자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여건에서 한국 신문은 우드워드 같은 기자를 배출할 수 없다”며 두 가지 개선을 주문했어요.

“첫번째 장애물은 순환식 인사제도이다. 내근, 외근을 교차해야 하고, 출입처도 한 영역으로 고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한국 언론의 현실이다. 전문성의 존중 보다 기회의 평등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애요소는 정년(停年) 제도다. 75세(지금은 79세)인 우드워드는 지금도 현역 기자로 기사를 취재한다. 한국 기자면 이미 퇴직한 지 15년이 지난 후일 것이다. 경륜과 권위를 가지고 권력자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질문할 수 있는 기자는 구조적으로 존재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밥 우드워드 부부 모습. 1989년 우드워드의 세번째 부인이 된 엘사 월쉬(Elsa Walsh)는 1957년생으로 뉴요커(The New Yorker) 기자로 활동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이제라도 평생 직업으로서의 기자(記者)에 대한, 그리고 그러한 기자를 키워낼 수 있는 언론사에 대한 새로운 발상(發想)이 시도돼야 한다. 그래야 기자가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감시자’가 되고, 언론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을 갖게 된다.”

‘워터게이트 보도 50주년’에 80세를 앞둔 지금도 ‘기자 혼(魂)’이 뜨거운 밥 우드워드와 그의 활동을, 우리는 먼 나라 사람 얘기라고만 여길건가요? 한국 언론의 위기감이 높은 이때, 우드워드를 능가하는 일류 기자, 근성있는 기자들이 많이 나오길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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