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 거리를 지나다 휘발유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주유소를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웠다. 갤런(3.78L)당 5.4달러였다. 소형 SUV 연료통을 가득 채우니 영수증에 66달러(약 8만6000원)가 찍혔다. 미국 와서 처음 보는 숫자에 “헉” 소리가 나왔다. 1년 전엔 기름을 가득 채우는 데 42~44달러면 충분했다. 2년 전엔 35~37달러 정도였다. “그러지 않아도 차량 운행을 최소화하는데, 지금보다 더 줄여야 하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미 평균 유가가 갤런당 5달러(약 6500원)를 오르내리며 사상 최고치를 이어가고 있다. L당 1900원 정도인 미국은 현재 2100원 안팎인 한국 휘발유 가격보다는 낮지만, 넓은 땅에서 장거리 운행할 일이 많고 대중교통 인프라가 취약한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선 가계에 적잖은 타격을 주는 액수다. 월가 분석에 따르면 미 가구당 자동차 휘발유 구매에 드는 연평균 비용이 지난해 2800달러에서 올해 5000달러로 80%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치솟는 유가에 미국인들은 자동차 운행을 줄이기 시작했다. 에너지 데이터 제공 업체 OPIS에 따르면, 6월 첫 주 미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경유 판매액은 지난해 동기보다 8.2% 감소했다. 연료를 조금씩 자주 채우느라 주유소 방문 횟수는 되레 늘었다고 한다. 기름값에 위축된 사람들이 주유소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 사는 것을 자제하면서 편의점 매출이 동반 하락했다. 경제 매체 CNBC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4년 만에 나타난, 전형적인 침체기의 주유소 소비 패턴”이라고 전했다.
미 공중파 방송과 지역 온라인 매체 등에선 매일 ‘기름값 아끼는 법’ 같은 안내성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유력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 신문 한 면을 털었다. ‘주유소별 맞춤 할인 카드를 사용하라’ ‘급정거, 급발진을 피하라’ ‘트렁크를 비워라’ ‘기름값이 싼 주유소 찾아 먼 길 가는 바보짓을 말라’ 등 상식적인 조언부터 ‘신호 대기해야 하는 좌회전은 연비(燃費)의 적’ ‘타이어 공기압을 확인하라’ ‘기름값은 주말, 특히 토요일이 제일 비싸다’ ‘연료통이 완전히 빈 것보다 4분의 1쯤 남아있을 때 기름을 채우는 게 좋다’ 등 시시콜콜한 안내까지 나왔다.
소비자들은 꼭 필요한 자동차 운행을 제외한 여행과 외식, 쇼핑을 줄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고 있음에도 교통비 부담 때문에 재택근무가 다시 늘고 있다. 원격 근무가 불가능한 업종은 상황이 더 어렵다. WSJ에 따르면 장거리 통근을 감수하는 건설 현장 인부들이 급감하면서 각종 건설 계획이 좌초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가 상승에 따른 소비·생산의 동시 위축은 경기 침체 우려를 부채질하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22일 상원에서 “확실한 가능성이 있다(It’s certainly a possibility)”라며 침체 위기를 처음 인정했다.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급등에 지지율이 39%까지 추락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는 22일 향후 3개월간 휘발유와 디젤에 대해 각각 갤런당 18센트, 24센트씩 연방 유류세를 면제하도록 하는 법안을 처리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현재 유가 급등은 글로벌 공급 부족에 따른 것이라 유류세 면제가 휘발유 수요를 늘려 가격 상승을 더 자극할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연방 유류세 인하 시 소비자의 3분의 1 정도만 혜택을 보고, 감면 세액 대부분은 업체 주머니로 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골드만삭스는 올여름 미 유가가 갤런당 6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