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걸린 성조기 - 2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여성 낙태권 지지자들이 찢어진 성조기를 거꾸로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 연방대법원은 전날 임신 6개월 이전의 낙태권을 보장해온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폐기했다. /UPI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 낙태권을 보장한 판례를 뒤집자 미국이 격렬한 찬반 논란으로 두 쪽 나고 있다. 보수 우위의 미 대법원은 지난 24일(현지 시각) 임신 24주 이전까지의 낙태를 연방 차원에서 합법화한 1973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 낙태 불법화 여부를 각 주(州)의 판단에 맡기도록 했다.

미시시피·아칸소·위스콘신·애리조나 등 13개 주에선 형사 처벌을 우려한 낙태 병원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이들 주는 이미 대법원의 낙태권 보장 판례 파기 시 1973년 이전, 19세기식 낙태 규제를 자동 복원할 수 있는 트리거(trigger·방아쇠) 조항을 담은 법을 마련했다. 이 중 9곳은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임신에 대한 낙태도 금지한다.

미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지난 25일 워싱턴 DC의 연방대법원 앞에서 전날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를 비난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앞으로 미 50개 주 중 플로리다·텍사스를 포함한 최소 26개 주가 낙태를 금지·제한, 3600만여 명의 가임기 여성들이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캘리포니아·뉴욕 등 진보 성향 주들은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넘어오는 다른 주의 여성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콜로라도·캔자스 등 낙태 불법 지역으로 둘러싸인 중부 주에 원정 낙태 수요가 몰릴 것”이라며 “국경을 넘어 (비용이 저렴한) 멕시코로 가 시술 받으려는 여성들도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정 시술이 여의치 않은 임부들은 무허가 시술을 감행할 가능성도 있다.

진보·젊은 층 여론에 민감한 대기업들은 직원들의 낙태권 보호 조치에 나서고 있다. 아마존·애플·메타·마이크로소프트·우버 등 실리콘밸리 기업, JP모건과 골드만삭스·시티그룹·도이체방크 등 월가 금융사, 디즈니·스타벅스·나이키·리바이스 등 글로벌 대기업들은 직원들의 원정 낙태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아웃도어 업체 파타고니아는 직원들이 낙태권 옹호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면 보석금을 내주겠다고 했다.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인정한 판례를 폐기한 다음날인 25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낙태권 옹호단체가 거리 집회를 벌이고 있다. 이들이 든 '옷걸이' 그림은 1973년 이전 대부분 주에서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 여성들이 철제 옷걸이 등을 이용해 무허가 낙태 시술을 받았던 것을 상징한다. /AFP 연합뉴스

국제사회도 이번 판결을 여성 인권 후퇴 측면에서 비판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24일 “여성의 선택권이 크게 후퇴했다”고 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 대법원에 의해 자유에 도전을 받은 모든 여성에게 연대를 표한다”고 했다. 트뤼도 쥐스탱 캐나다 총리와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여성의 기본권을 박탈한 끔찍한 일”이라고 했고, 유엔인구기금과 유엔인권사무소도 비판 성명을 냈다. 반면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큰 나라가 낙태 문제에서 입장을 바꿨다”며 “이번 판결은 인간의 생산성이라는 진지하고 시급한 문제에 대해 함께 숙고해보자는 강력한 초청장”이라고 밝혔다.

미 대법원이 낙태권 폐기, 공공장소 총기 휴대 허용 등에 이어 동성애 금지 등 보수 진영의 숙원을 공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로 대 웨이드’ 폐기에 찬성한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이번에 보충 입장에서 “향후 부부 간 피임이나 동성애·동성혼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대법원과 공화당의 폭주를 막기 위해선 11월 중간선거에서 각 주의회와 주정부 권력을 민주당에 줘야 한다”면서, 이번 사태를 중간선거 핵심 이슈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지난 24일 미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고 낙태 불법화 여부를 각 주의 판단에 맡긴다고 결정하자, 낙태 옹호단체들이 이 결정을 내린 보수 대법관 6명의 얼굴을 내걸고 이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게시물을 워싱턴 DC의 대법원 앞에 걸어놓았다. /로이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