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전 북한 남침으로 공산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해 목숨을 바친 미군 장병의 이름이 빼곡한 화강암 위에 ‘추모와 사랑’을 의미하는 노란 장미꽃이 놓였다. 포화 속에서 생을 마쳐야 했던 어느 젊은 전사자의 사진도 보인다. 미국 워싱턴DC의 한국전쟁(6·25전쟁) 참전 기념공원 ‘추모의 벽’에는 미군 3만6634명, 한국군 지원부대(카투사) 7174명 등 총 4만3808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제막식을 하루 앞둔 26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오늘 그리고 매일 우리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를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7월 27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한국전쟁(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전사자 추모의벽 제막식이 열렸다. 많은 참전용사 유족과 친척들이 참석해 추모의벽에 새겨진 전사자의 이름을 찾으며 고인을 추모했다./로이터

27일 오전 9시 56분(현지 시각)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인 ‘세컨드 젠틀맨’ 더그 엠호프,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미국 워싱턴DC 시내 한국전쟁(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에 들어섰다. 존 틸럴리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재단 이사장의 안내를 받아 새롭게 완공된 ‘추모의 벽’ 앞에 선 이들이 전사자들을 기리며 헌화하자 기념공원 내에 모여있던 약 2000명의 참석자가 일제히 기립했다. 의장대가 연주하는 트럼펫의 선율이 울리는 동안 식장에는 엄숙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 해병대 나팔수가 2022년 7월 27일 수요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의 새로 공개된 추모의 벽 헌납식에서 "탭스"를 연주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란 글귀로 유명한 기존의 조형물 부근에 새로 만든 높이 1m, 둘레 130m의 화강암 추모의 벽에는 미군 전사자 3만6634명과 한국군 지원 부대(카투사) 전사자 7174명 총 4만3808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통계로만 남아있던 한국전쟁(6·25전쟁) 전사자들이 추상적 숫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이 부르던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전협정일 맞춰 열린 '추모의 벽' 제막식 - 27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시내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서‘추모의 벽’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등 약 2000명이 참석했다. /뉴스1

이날 오전 8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한국전쟁 기념공원 주변에는 한미 양국 참전 용사와 가족, 양국 국방부와 보훈처 당국자 등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온 26도, 습도 75%의 찌는 여름 날씨 속에서도 정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잊힌 전쟁’으로 불리던 한국전쟁(6·25전쟁)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벽’ 제막식에 참석하려는 인파였다. 일라이 래트너 국방부 인도·태평양 안보 담당 차관보,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 대사, 유미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 부인, 최태원 SK 회장, 이헌승 국회 국방위원장, 조태용 주미 한국 대사의 모습도 보였다. 한미동맹재단 이사장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회장 정승조 전 합참의장, 명예이사장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 등도 참석했다.

27일(현지시각) 한 미국인 소녀가 추모의 벽에 꽃을 놓고있다. /UPI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박민식 보훈처장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추모의 벽은 미군과 카투사 소속 한국군 전사자를 함께 기림으로써 한미 혈맹의 강고함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라고 했다. 또 “72년 전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공산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면서 “이름을 한 분 한 분 새김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전사자 이름 탁본 뜨고 장미꽃으로 추모 - 6·25전쟁 미군 전사자의 유가족이‘추모의 벽’에 새겨진 가족 이름의 탁본을 뜨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 엠호프는 “미국과 한국의 용감한 장병들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나란히 싸우며 번성하는 대한민국과 깨지지 않는 강력한 한미 동맹의 근간을 만든 것을 기념하는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라며 “3만6000여 명의 미군 전사자, 7000여 명의 카투사 전사자들 이름은 이제 영원히 여기 워싱턴DC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추모식 전날인 26일(현지 시각) 발표한 한국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선포문에서 “오늘 그리고 매일 우리는 계속해서 한국전쟁 참전 용사를 기억하며 이들이 미국과 우리의 지고한 이상이 실현되도록 해준 것을 존경한다”고 했다.

27일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의 추모의 벽에서 한 유가족이 추모의 벽에 있는 한 참전용사의 이름을 탁본을 하고있다 (AP 사진/패트릭 세만스키)/2022-07-28 01:22:14

제막식에 참석한 참전용사 로버트 드마르셀러스(92)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기리기로 한 것은 너무나 좋은 생각이었다”며 감격했다. 미 공군 폭격단 소속으로 참전했던 잭 페닝턴(89)씨도 “한국전쟁 때 잃은 친구들의 이름이 어디 있는지 제막식 후 천천히 찾아볼 생각”이라며 “워싱턴DC 인근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추모의 벽까지 생겨 반갑다”고 했다.

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에서 공식 헌납식을 앞두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추모객들이 새 추모의 벽을 방문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전사자 가족, 실종되거나 전쟁 포로가 됐다가 끝내 전사자로 분류된 가족 800여 명에게는 제막식 전날인 26일 오후 추모의 벽을 미리 둘러볼 기회가 주어졌다. 검은 화강암 벽에 빼곡히 새겨진 6·25전쟁 전사자·실종자 이름들 위로 ‘추모와 사랑’을 뜻하는 노란 장미꽃이 놓였다. 각인된 이름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미 육군 24보병연대 24정찰중대 소속으로 6·25전쟁 발발 초기 참전했던 조지 크리스타노프(전사 당시 27세) 대위의 외동딸 메릴루(73)씨는 벽에 각인된 부친의 이름 위에 종이를 대고 정성스럽게 탁본했다. 메릴루씨는 “젊음을 바쳐 한국을 지킨 이들의 이름을 워싱턴DC 한복판에 새겨 기억해 준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펜실베니아 슈가노치의 출신의 미 육군 하사관 존 피셔(John Fisher)의 사진이 27일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의 추모의 벽에 새겨진 그의 이름 아래에 놓여져 있다 /AP 연합뉴스
27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시내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서 세워진 ‘추모의 벽'을 따라 꽃이 놓여져있다./UPI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