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전기차 등 핵심 산업과 주요 물자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한국에 투자하려던 대만 반도체 기업을 설득, 약 7조원 규모의 투자를 미국으로 돌리게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현지 시각) 지나 러먼도 미 상무장관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난 6월 신규 공장 투자처를 찾던 대만 기업 글로벌웨이퍼스의 도리스 수 최고경영자(CEO)와 1시간 동안 통화해 대미 투자 결정을 받아냈다고 보도했다. 글로벌웨이퍼스는 세계 3위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집적회로의 핵심 재료) 생산업체로, 지난 2월 독일 투자가 무산된 뒤 유력한 대체지로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 투자를 설득하는 러먼도 장관에게 수 CEO가 “한국에선 공장 건설 비용이 미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하자, 러먼도 장관은 “거기에 맞춰주겠다(We will make the math work)”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그로부터 2주 뒤 글로벌웨이퍼스는 텍사스주에 50억달러(약 6조9195억원)를 들여 일자리 1500개를 창출하는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러먼도 장관은 이날 WSJ에 “미국이 핵심 광물,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특정 기술 분야를 지배할 필요가 있다”며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미국에서의 투자”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미래의 경제 패권을 결정짓는 핵심 물자 확보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얼마나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첨단 산업 전장(戰場)에서는 동맹이라고 양보하지 않고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도 나온다.
바이든 정부가 공개적으로 설정한 산업 전쟁의 최전선은 ‘미·중 경쟁’이지만, 가치를 공유하는 핵심 동맹인 한국도 경쟁 상대가 되고 있다. 지난달 미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북미 지역에서 생산하지 않은 전기차에 대해 보조금 지급을 배제하는 방안을 담았다. 이에 따라 한국 자동차 업계와 정부가 ‘한국산 전기차 차별’이라며 뒤늦게 대응에 나서고 있다.
러먼도 장관은 뉴욕의 벤처투자사 부사장을 거쳐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를 지낸 인물로,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된다. WSJ에 따르면, 지난 7월 52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이 의회를 통과할 때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정부 고위 인사들을 접촉해 공화당 상원의원 17명의 지지를 이끌어낼 정도로 대담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가 이끄는 상무부는 우리의 산업통상자원부와 유사하다. 미·중 무역 전쟁과 핵심 산업 공급망 재편이 경제·안보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면서 바이든 정부 부처 중 가장 많은 예산·인력 증가율을 기록한 ‘공룡 부처’가 됐다. 러먼도 장관은 지난해부터 인프라 투자법과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1000억달러(약 138조4500억원) 이상을 상무부 추가 예산으로 끌어와 외국 기업 투자 유치와 자국 기업 지원에 투입하고 있다.
러먼도 장관은 6일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반도체 지원법 세부안을 공개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날 발표의 핵심은 내년부터 390억달러(약 54조원)를 풀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더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러먼도 장관은 “자금을 지원받는 기업은 앞으로 10년간 중국 내에서 첨단 공정 시설을 지을 수 없다. 만약 지원금을 받고도 이를 어기면 자금을 회수할 것”이라며 “우리가 기업을 평가할 때 살필 모든 요소는 ‘미국 국가안보 보호’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이 지원금을 기대할 수 있지만, ‘중국 투자 제한’이라는 가드레일 규정이 복병이 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