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 브루클린의 ‘파크 슬로프(Park Slope)’ 지역은 ‘진보적(progressive)’이기로 유명한 백인 부촌이다. 경찰과 교도소 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백인이 6만7000명의 전체 주민 중 70% 가까운 이 지역에선 작년에 뉴욕시 의회 사상 최초로 무슬림 여성 샤하나 하니프(31)가 시의원에 당선됐다.

이런 동네에서 두 달 전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놓고,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는 주민들이 반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지역 매체인 ‘헬게이트’ ‘커먼센스’ 등의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지난 8월3일 오전 6시쯤 반려견과 이 지역의 ‘프로스펙트 공원’ 안을 산책하던 백인 여성 제시카 크러스틱(40)은 맞은편에서 나무 몽둥이를 들고 혼자 욕설을 중얼거리며 오는 정신이상 부랑자인 흑인 남성을 마주쳤다. 전에 몇 번 마주쳤지만, 다른 길로 피했다. 그러나 이번엔 여의치 않았다.

뉴욕시 브루클린 파크슬로프에서 공원을 산책하다가 흑인 정신이상 부랑자의 공격을 받은 여성 크러스틱과 반려견 '무스'./뉴욕포스트

이 남자는 크러스틱과 반려견을 향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고, 여성은 오던 길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32㎏ 체중의 반려견 ‘무스’는 주인을 보호하려는 듯 몽둥이를 휘두르는 남자 쪽으로 줄을 끌었고 결국 몽둥이에 코를 맞아 피를 흘렸다.

부랑자의 공격이 발생한 프로스펙트 공원에서는 평소에도 긴 막대기에 짐을 맨 홈리스 피플이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뉴욕포스트

남자는 소변이 든 통도 여성과 반려견에게 뿌렸다. 산책하던 주민들이 소리를 질러 이 부랑자를 쫓았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왔을 때에는 부랑자는 공원에서 사라졌다. 크러스틱은 반려견을 겨우 집으로 데려와 치료했지만, 반려견이 몽둥이에 맞아 내장이 파열된 것을 몰랐다. 며칠 뒤 패혈증을 일으킨 개는 두 차례 긴급 수술에도 죽었다.

◇처음엔 피해 여성에 ‘위로’ ‘동정’ ‘모금’ 답지했지만

이 공원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전에도 많이 이 부랑자에게 봉변을 당했다. 이번 사건 이후에도 계속 목격됐지만, 그는 지금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크러스틱은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넥스트도어’에 이 사건을 올리고, 이 부랑자를 목격하는 사람은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상황은 이상하게 전개됐다.

처음엔, “이 위협적인 정신이상자를 왜 빨리 체포하지 않느냐” “사이코패스이고 약자를 공격하는 약탈자는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피해 여성에 대한 위로와 동정이 주(主)였다.

그런데 슬슬 “왜 백인들이 홈리스(homeless)에, 감정적으로 혼란을 겪는 흑인을 잡으려고 하느냐” “개를 보호하지 못했으니 개를 키울 자격도 없었다”는 비난과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진보적인 남성 동성애자 ”자경대 조직하자”고 했다가 뭇매 맞아

기후변화와 같은 진보적 가치의 비영리 기업을 운영하는 한 남성(59)은 ‘넥스트도어’에 주민 자경대(自警隊)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지역 매체 ‘커먼센스’에 따르면, 고작 6명이 모인 첫 오프라인 모임에, 진보적인 백인 20대 4명이 뒤늦게 마이크를 갖고 나타나 모임을 방해했다.

이들은 “많은 사람이 경찰에 쫓기는 시점에, 우리가 지금 제일 원치 않는 게 공원에 경찰이 더 많이 배치되는 것” “범죄는 추상적인 개념이며, 미국에서 범죄는 흑인과 빈민을 타깃으로 구성됐다” “이 남자는 상상할 수 없는 압박에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아마도 정신다양인(neurodivergent)”이라고 주장했다. ‘정신다양’은 ‘정신이상(異常)‘에 대한 ‘사회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표현이다.

프로스펙트 공원 입구에 서 있는 두 마리의 팬서 동상 중 하나.

자경대 이름을, 공원 입구의 상징적 동상(銅像)인 팬서(panther)에서 따 ‘파크슬로프 팬서스’라고 한 것도 공격을 받았다. 다른 진보적 주민들은 1960년대 미국 내 폭력적 흑인 우선주의 정당이자 마르크스 주의에 젖었던 ‘블랙팬서스(Black Panthersㆍ흑표당)’를 떠올렸고 “부유한 백인이 팬서의 이름을 악용해 흑인을 공격한다”고 비난했다.

자경대 모임을 처음 주도한 남성의 집엔 “경찰 노릇하지 말라”는 낙서가 갈겨졌다. 그런데 사실 이 남성도 동성애자에, 진보주의자였다. 진보적인 백인 동네에서 이런 모임을 주동한다고, 미국의 보수 TV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꺼지라”고 욕하며 거절했던 그였다. 그런데 졸지에 ‘진보의 표적’이 됐다. 그는 자경대 계획을 포기했다.

심지어 그가 쓴 글도 소셜미디어 ‘넥스트도어’에서 영문도 모르게 삭제됐다. 두 달 뒤, 다시 글쓰기가 허용돼 그는 “프로스펙트 공원 방랑자는 아직도 소재 미파악. 폭력적이고 사이코패스임”이라고 썼지만 이 플랫폼 운영자는 곧 삭제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뉴욕시 미 연방 하원의원

미국 민주당 내에서도 극좌파인 뉴욕시 연방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는 ‘넥스트도어’에 대해 “백인 특권층이 동네 흑인과 히스패틱(브라운) 이웃들을 마구 상상 속 범죄자로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흑인 부랑자를 위해, 기금 마련하자” 제안

52세의 한 남성 무용가는 “400년 간의 (노예제도라는) 조직적인 인종차별 탓에 흑인들이 집을 소유하는 등의 일반적인 부를 형성하지 못했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극도의 빈부 격차를 보게 된 것이다”며 “흑인 부랑자를 체포해 감옥에 보내는 것은 아무런 해법이 안 되며, 파크 슬로프 지역의 부(富)를 갖고 그를 위해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공공 안전’과 ‘약자를 위한 사회 정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

피해 여성 크러스틱과 그에 동조하는 이들의 주장은 사실 간단한 것이었다. ‘한 부랑자가 산책하는 여성을 공격했고, 개를 죽였다. 그를 빨리 체포해, 공원을 안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슈에, 흑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동등한 권리와 몫을 보장하자는 진보의 가치인 ‘사회 정의(social justice)’가 결부되면서, 뉴욕시의 대표적인 백인 진보주의 동네 주민들 간에 반목이 일었다.

이 지역 경찰은 “머리를 꼬고, 긴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흑인 부랑자들이 많아서 못 잡는다”고 말한다. 몇 차례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번번이 늦었다.

피해 여성 크러스틱은 이 동네를 대표하는 뉴욕 시의원 샤하나 하니프를 만났지만, “나보다, 그 흑인 정신이상자의 안전을 더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NYT에 말했다.

하니프 시의원의 대변인은 NYT에 “뉴욕시 경찰이 우리 동네에 안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주민과 흑인 부랑자 누구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어떻게 이 상황을 진정시키느냐는 매우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 대변인의 호칭은 Mr.나 Ms. Mrs. Miss가 아니라, 성별(性別)을 알 수 없는 ‘Mx.’다.

피해 여성은 NYT에 정신이상 부랑자의 처지는 동정하면서도 “그 사람은 폭력적이고, 공원의 안전을 위해 체포돼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부랑자를 옹호하는 이들은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냐. 누군가 더 심하게 다치길 원하는 것이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해(害)를 당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진보적 언론 매체인 NYT도 답을 모르긴 매한가지인 듯하다. 이 신문은 “개를 사랑하는 진보적인 동네에서, 법과 질서를 수행하는 것과 (소수에 대한) 사회정의 요구가 충돌 할 때에, 뭐가 옳은 것인가, 이 흑인 남자에게 부당함(injustice)을 더하지 않고 공중을 보호할 방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