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는 신년호(1ㆍ2월)에서 ‘왜 미국의 발전 시대는 끝났는가(Why the age of American progress ended)’라는 제목의 장문의 특집 기사에서 “발명(invention)이 아니라, 이 발명을 정부와 산업계가 이행(implementation)하는 것이 세상을 바꾼다”며 “미국은 여전히 세계 연구개발(R&D)의 공장이지만, 발명을 구축하는 단계에 가면 후퇴한다”고 진단했다.

미국에선 흔히 에디슨의 전구 발명(1879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1903년), 알렉산더 벨의 전화기 등과 같은 위대한 발명품으로 역사를 배우지만, 세상은 이런 ‘유레카(Eurekaㆍ’찾았다’)의 전설’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잡지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수십년 간 많은 엔지니어에 의해 조금씩 수정됐듯이, 대부분의 주요 발명품은 초기에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며 “핵분열 현상이 원자로 내에서 발생하기 전에는 큰 에너지를 내지 못하듯이, 발명품은 규모의 생산, 가격 인하, 삶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미국은 지난 수 세대 동안 이 사실에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틀랜틱 먼슬리는 ‘발명 후에 이행이 안 따르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기초 연구에만 주력하는 미 연방정부, 마치 ‘초당적(超黨的)’ 연합이라도 한 듯한 공화ㆍ민주당 지지 성향 대중의 반(反)과학적 문화, 정부ㆍ고등교육기관ㆍ기업ㆍ언론 등 기존 제도에 대한 대중의 불신(不信) 등을 꼽았다. 다음은 애틀랜틱 먼슬리의 글 요약.

◇”연방 정부는 기초과학 연구에만 집중해야”

잡지는 “미국 정부가 기초과학 연구에만 집중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과학정책의 얼개를 짠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박사의 영향이 크다”고 밝혔다. 부시는 2차 대전 때 원자폭탄 개발인 맨해튼 계획을 추진한 것을 비롯해, 전시(戰時)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했다.

미국 대통령의 사실상 초대 과학 고문이었던 버니바 부시/위키피디아

부시는 1945년 7월 대통령 보고서인 ‘과학: 무한한 프런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에서 “연방정부는 기초 연구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말대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정부의 과학기술 분야 지출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40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부시는 이렇게 개발된 초기 기술이 산업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무엇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는 현실을 잘 아는 기업에 맡겨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많은 발명품이 정부와, 단기 이익을 꾀하고 위험을 피하려는 민간 벤처 사이에서 사라졌다.

예를 들어, 세계 최초의 태양 전지는 1954년 AT&T의 벨 연구소에서 처음 제작됐고, 미국은 1980년까지 어느 나라보다도 태양 에너지 연구에 집중했다. 그러나 과실(果實)을 따 먹은 것은 독일ㆍ중국ㆍ일본이었다.

이들 나라는 주택건설업자에게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도록 보조금을 주는 산업정책을 실시했고, 이후 시장은 커졌고 태양광 발전 비용은 지난 10년간 90% 낮춰졌다. 미국은 태양 에너지에 대한 기술적 우위를 잃었다.

◇미 정부ㆍ산업계가 파트너십 이룬 적도 있었지만…

미국이 늘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링컨 행정부는 철도 건설을 촉진했고, 뉴딜 정책은 미국 시골에도 전기를 공급했다. 아이젠하워는 사고(事故) 시 원자력 회사에 대한 책임을 제한하는 법을 서명해 원전 발전을 쉽게 했다. 케네디가 우주 탐험을 추구하자, 미 항공우주국(NASA)이 초기 반도체의 주요 소비자가 됐다. 그러자 수년 내 반도체 가격은 30분의1로 내려가고, 소프트웨어 혁명이 가속화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초고속(Warp Speed)’ 코로나 백신 개발도, ‘맨해튼 프로젝트’나 미국의 달 착륙 프로그램인 ‘아폴로 계획’처럼, 미 연방정부가 이룬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전의 한 예다.

뉴욕타임스는 “역사적으로 새 백신(vaccine)을 개발하는 데는 최소 4년이 걸린다”고 비관적으로 내다봤지만, 2020년 4월 코로나가 창궐하고 18개월 뒤인 2021년 가을 미국에선 첫 mRNA 백신이 나왔다.

미국 정부는 당시 역사상 가장 빠른 백신 개발을 위해, 연구→임상→승인→정부 대량 구입→배포(접종)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거해 활주로처럼 만들었다. 제약사가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수십억 달러 어치를 사전 주문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중보건 위기에 전시(戰時) 정책을 적용했다.

미국 정부가 ‘암과의 전쟁(1971~2015)’을 선포했을 때는 달랐다. 1973~2011년에 암 예방약에 대한 임상시험은 600건 미만이었다. 대조적으로 암 치료약물 임상시험은 3만 건에 달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암 예방약을 먹은 젊은이가 중년이 돼 직장암이 발생했는지를 따지기까지는 수십 년의 장기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약이 설령 예방 효과가 있었더라도, 제약사가 판매할 무렵엔 이미 특허는 만료된다. 이런 예방약 개발에 나설 제약사는 드물다.

잡지는 “심장병ㆍ암에 대해서도, 정부가 코로나처럼 국가적 재앙으로 여기고 ‘와프 스피드’를 적용하면, 연구에 세금을 쓰지 않고도 특허 기간을 유예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결단은 종종 ‘재앙’을 맞고서야 취해진다. 미국 정부는 1차 대전 때 항공 관련 기술, 2차 대전 때 레이더ㆍ페니실린 제조ㆍ핵(核)기술, 냉전 때 인터넷과 GPS, 팬데믹 때 mRNA 백신 개발을 직접 관여하고 촉진했다.

◇서로 담합한 듯한 공화ㆍ민주 양당의 반(反)과학주의

2021년 4월까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 백신을 배포했다. 그러나 접종율은 몽골, 에콰도르에 이어 36위였다. ‘공급’이 아니라 ‘수요’가 문제였다.

미국의 동서 해안에 사는 소위 교양 높은 엘리트들은 민주당원임을 자처했고, 이들이 장악한 제도ㆍ기관에 무시 당한다고 느낀 공화당원들은 전문성과 과학에 떳떳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됐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민주당원은 이런 ‘반(反)문명’ ‘반(反)기술’ 세력의 또 한 축이다. 좌파 환경주의자들은 풍력ㆍ태양광 발전소도 막는다. ‘건설’의 성장보다는, ‘줄이고 다시 쓰고 재활용하는(reduce, reuse, recycle)’ 보존과 희생을 강조하는 ‘탈(脫)성장주의(degrowtherism)’로 생활 수준의 영구적인 쇠퇴를 초래한다.

노숙인 비율이 가장 높은 뉴욕ㆍ하와이ㆍ캘리포니아주ㆍ오레건ㆍ워싱턴 주는 모두 민주당이 장악한 주들이다. 애틀랜틱 먼슬리는 “마치 미국은 인류 발전의 가장 중요한 동력(動力)에 저항하기 위해 초당적 연합이라도 한 것 같다”고 했다.

◇”발전은 결국 신뢰의 문제”

애틀랜틱 먼슬리는 “사적으로 이뤄진 ‘발명(invention)‘이 공개적으로 구현(implementation)’되려면, 이런 변화로 모두가 혜택을 받는다는 믿음이 공유돼야 한다”며 “현재 미국은 정부와 대기업, 테크노 기업, 언론 등 모든 제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잡지는 “신뢰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사람들의 네트워크는 집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공유된 자원”이라고 했으나, ‘발전’을 이룰 이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이냐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1만 년 전부터 인류를 괴롭히고 20세기에만 3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연두를 박멸하기까지 ‘서로의 신뢰’가 전(全)지구적으로 이룬 ‘발전’을 소개했다.

◇”멋진 얘기는 한 사람이 만들지만, 발전은 모두의 얘기”

1796년 영국의 한 지방 의사인 에드워드 제너가 소의 우두(牛痘)농을 정원사 아들인 8세 제임스 핍스에게 접종했다. 1주일 아팠던 소년은 이후 진짜 천연두 바이러스가 접종되고도 발병하지 않았다.

제너에겐 ‘유레카’의 순간이었지만, 당시 전세계 인구 10억 명에겐 영향을 못 끼치는 ‘발명’이었다. 영국 왕립학회는 제너의 논문 게재를 거부했고, 의료계는 무시했다. 그러나 런던의 외과의사 헨리 클린이 제너의 우두법을 인정하고 전파했다.

냉장시설도, 비행기도 없는 시절에 신대륙까지 우두농(백신)을 옮기기 위해, 22명의 고아가 배에서 차례로 우두농을 맞았다. 한 아이가 접종돼 우두농이 생기면, 그 우두농을 다음 아이에게 옮겨 접종하는 릴레이로, 지금의 베네수엘라까지 6000㎞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인들은 “우두를 접종하면, 배에서 소가 튀어나온다”고 했지만, 영향력 있는 정치가, 성직자들이 접종을 장려했다.

저개발국가들은 접종 맞을 돈이 없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천연두 예방 접종을 지휘하던 38세의 도널드 A 핸더슨은 천연두 감염자 주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우두 접종하는 ‘포위 접종(ring vaccination)’ 전략을 개발했다. 미국 미생물학자 벤자민 루빈은 끝이 갈라진 바늘을 통해, 백신 용기(vial)에서 아주 작은 한 방울로 접종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전보다 용기 당 접종자 수가 4배로 늘어났다. 1980년 WHO는 천연두가 박멸됐다고 선언했다.

애틀랜틱 먼슬리는 “마지막으로 접종된 백신 한 방울에는 제너와 소년 핍스, 고아들, 핸더슨과 루빈 등 수많은 사람의 헌신이 녹아 있었다”며, “하나의 멋진 얘기는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 수 있지만, 발전은 우리 모두의 스토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