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벨라 아르테 궁전 앞의 한 전망 좋은 커피숍에서 미국 직장인들이 일하고 있다. 따뜻하고 물가가 싼 멕시코는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 확산에 따라 장기 체류를 위해 밀려드는 미국 젊은 직장인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처럼 일과 여가를 결합한 '블레저'족들이 MZ세대를 중심으로 급증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코로나 팬데믹으로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재택·원격 근무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일과 여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업무상 출장(business)과 여가(leisure)의 합성어인 ‘블레저(bleisure)’ 문화가 확산하며 관련 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블레저는 2009년 나온 용어로, 당초 회사 출장 등 공식 일정 전후에 관광이나 쇼핑, 레저 활동을 즐기는 임원들의 행동을 뜻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업무의 시간·공간 제약이 없어지면서 일반 직장인들이 휴가지에서 개인 비용으로 체류하며 업무를 본다는 개념으로 확대됐다.

블레저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가 항공업계다. 코로나 이전 미 항공사 매출의 절반이 승객의 12%를 차지하는 기업 출장 인력의 비즈니스 좌석 구매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휴가복 차림에 노트북을 들고 개인 카드로 비즈니스 티켓을 사는 블레저족(族)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과거 목·금요일에 떠나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던 왕복 비즈니스석 탑승자의 여행 패턴이 화·수요일에 떠나 1~2주 현지에서 머물다 돌아오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뉴욕이나 LA가 대부분이던 비즈니스 고객의 목적지에도 애틀랜타나 올랜도 같은 남부 휴양 도시 이름이 속속 추가되고 있다. 이 같은 비행 수요는 휴가철이나 명절이 아닌 평소에도 이어지고 있다. ‘주 5일 근무, 주말 이틀 휴식, 여름휴가 2주’라는 직장인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항공사들은 블레저 트렌드에 맞춰 노선과 운임, 좌석 등을 재편하고 있다.

지난 11월 미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버지니아의 로널드 레이건 국제공항의 모습. 항공사들은 비행기 여행객들이 이제 팬데믹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특히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즈니스 좌석은 기존의 공식 기업 출장자들보다는 원격 근무를 하려는 '블레저'족들이 대체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원격 근무는 팬데믹이 잦아드는 2023년에도 주요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블룸버그 통신은 전망했다. 최근 갤럽 조사에서 원격 근무 중인 미 근로자 75%가 앞으로 하이브리드(대면·원격 근무 혼합) 또는 원격 근무를 계속하겠다고 답했다. 근로자들이 예전처럼 출퇴근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쓰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것이다. 임금과 복지를 다소 줄이더라도 재택근무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사의 출근 강요는 ‘갑질’로 분류되고 있다.

기업과 공공기관은 원격 근무의 이점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뉴욕 등 대도시 본사와 사무실의 행정 인력을 줄이며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원격 근무가 업종별 인재 풀을 확대하는 효과를 낸다는 사례도 있다. 미 보훈부 같은 정부 부처는 최근 워싱턴DC로 통근할 인력을 찾는 대신 실리콘밸리 인재를 채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