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3월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게 중국공산당의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24일(현지 시각) 알려졌다. 폼페이오 전 장관은 이날 미국에서 출간된 회고록 ‘한 치도 양보하지 말라(Never Give an Inch): 내가 사랑하는 미국을 위해 싸우다’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책에서 폼페이오는 2018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났을 때 “중국 공산당은 줄곧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나면 김(정은) 위원장이 매우 행복해 할 것’이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자 “이 말에 김(정은)이 웃더니 ‘중국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외치며 신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고 했다. 폼페이오는 “김정은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 내 미국인들이 필요하며, 중국 공산당은 한반도를 티베트나 신장처럼 다루기 위해 미국의 철수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김정은이 그만큼 중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폼페이오는 “김정은은 (중국으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했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과소평가했다”며 “한반도에서 미국의 미사일이나 지상 전력이 증강되는 것을 북한인들은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이 회고록에서 폼페이오는 고모부 장성택 등을 처형한 김정은을 “피에 굶주린 징그러운 놈(bloodthirsty toad)”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는 시진핑이 음침하다고 생각한다. 푸틴은 사악하더라도 재미있고 쾌활할 수 있지만, 시진핑은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눈(dead eyed)을 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는 “(시진핑이)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 “중국 공산당은 김 위원장이 협상을 타결할 재량을 거의 주지 않았다”며 “북한 문제는 항상 중국 공산당과의 대리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폼페이오 전 장관은 2018년 3월 극비 방북 당시 미 군용기가 북한 영공에 들어서자 북한도 전투기를 발진시켰다고 회고했다. 그는 “만약 북한이 어떤 멍청한 짓을 하면 미국 구조팀이 곧바로 와서 우리 유해를 수습할 것이라고 조종사가 알려줬다”고 했다. 평양에 도착한 폼페이오를 맞이한 김영철 당시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아무런 환영 인사말 없이 “우리는 지난 50년간 풀을 먹었다. 앞으로 50년간 풀을 먹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폼페이오는 “점심시간까지 기다리기가 힘들다”라며 “내 풀은 쪄서 줬으면 좋겠다”고 응수했다.
마침내 김정은을 만난 순간에 대해 폼페이오는 “언제나 ‘쇼맨’인 김 위원장은 긴 붉은 카펫 끝에 그의 시그니처인 검은 인민복을 입고 밝은 주황색 벽 앞에 서 있었다”며 “그 색채와 조명이 그의 머리 위에 후광이 있는 듯한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기록했다. 김정은과의 면담은 45분마다 김정은이 “중요한 전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잠시 중단됐다. 폼페이오는 “이 전화들은 사실 ‘말버러 맨’의 호출이었다”며 “김(정은)은 심각한 흡연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썼다. 첫 만남에서 폼페이오가 “이 협상이 잘되면 마이애미의 가장 멋진 해변으로 초청해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쿠바산 시가를 피우게 해 주겠다”고 말하자, 김정은은 “나는 이미 ‘카스트로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2018년 6월 김정은이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던 순간에 대해 폼페이오는 “내 북한 친구(김정은)가 키 높이 구두를 신은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키가 5피트 5인치(약 165㎝) 정도인 김 위원장은 말 그대로 1인치(약 2.54㎝)도 양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자신이 영국 가수 엘턴 존의 노래 제목을 따서 김정은에게 “리틀 로켓 맨”이란 별명을 붙인 것은 좋은 뜻이었다고 말하자, 김정은은 “‘로켓 맨’은 오케이. ‘리틀’은 낫 오케이”라고 답했다고 했다.
폼페이오는 북한 관광을 갔다가 억류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씨가 2017년 6월 식물인간 상태에서 미국으로 송환된 직후 사망했는데도 북한이 ‘치료비’를 미국에 청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격분했다며 “CIA에서 코리아 미션 센터 지도부와 회의를 열고 웜비어의 죽음에 복수하기로 맹세했다”고 썼다.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당시의 상황에 대해 폼페이오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게 해체하면 미국은 그 대가로 ‘몇 개의 소규모 한국 투자 프로젝트’를 허용해 주려고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영변 단지 해체 대가로 “완전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트럼프가 이를 거부하자, 김정은은 “통역할 필요 없이 심한 욕설을 하는 표정으로 김영철을 노려봤다”고 폼페이오는 회고했다. 사전 협상 내용을 김정은이 잘못 보고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후 2019년 6월 트럼프의 방한 당시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미 정상회동에 대해 폼페이오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 역사적 만남에 참여하겠다고 요구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고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이 몇 번이나 내게 직접 전화를 했고, 나는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만 만나는 쪽을 선호한다’고 잘 준비된 대답을 했다”고 했다. 폼페이오는 “문 대통령의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내줄 시간도 존경심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이라고 했다.
폼페이오는 또 김정은은 미국이 종전 선언을 해주기를 바랐지만, 실제 평화협정에는 동의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김정은이 자신의 방북 즈음 북한 인권 상황을 비판하는 국무부 연례 인권 보고서가 나온 것을 언짢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배를 침몰시키고 사람들을 실종시키며 무고한 이들을 죽이는 것을 그만두라. 그러면 그 보고서도 없어질지 모르겠다”고 쏘아붙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