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해안가 상공에서 중국의 대형 정찰 풍선이 미 공군 F-22 랩터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격추돼 폭발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중 관계가 또다시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미국은 5~6일로 예정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미국 해군연구소

4일 오후 2시 39분(현지 시각) 대서양과 맞닿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해안가 상공에서 폭음과 함께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 공군의 F-22 랩터 전투기가 AIM-9X 공대공미사일로 일주일간 미 대륙을 가로질러 비행한 중국의 대형 정찰 풍선을 격추하는 순간이었다. 풍선을 격추한 전투기의 콜사인은 ‘프랭크 01′.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정찰 풍선 14개를 격추한 에이스 공군 조종사 프랭크 루크 주니어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 등은 보도했다.

미국이 전투기를 동원, 1만5000여㎞를 비행하며 자국 영공을 침범한 중국 정찰 풍선을 격추하자 최근 긴장 완화를 모색하던 미·중 관계가 또다시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미국은 5~6일로 예정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을 전격 취소했다.

미 국방부는 로이드 오스틴 장관 명의 성명을 통해 “미 북부사령부 소속 전투기가 중국의 고고도 정찰 풍선을 성공적으로 격추했다”며 “용납할 수 없는 중국의 주권 침해에 대한 대응”이라고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지난 1일 가급적 빨리 격추하라고 국방부에 명령했고, 그들은 격추하기 안전한 장소로 진입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며 “연안 12해리 이내 영해에 진입했을 때가 최적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항행(航行)의 자유’를 보장받는 공해(公海)로 들어서기 전 미국 영해 내에서 격추했다는 취지였다.

자료=FT·가디언·아큐웨더 등 종합 그래픽=양인성

중국 외교부는 5일 “비행선(풍선)은 민간용이고, 불가항력으로 미국에 진입했다”며 “미국이 무력을 동원해 과잉 반응을 보인 것은 국제 관례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중국은 기상관측 등에 사용되는 풍선이 바람에 실려 경로를 이탈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미 국방부는 이 중국 정찰 풍선이 동력 공급을 위한 태양광 패널과 프로펠러, 카메라, 정찰 장비와 정교한 통신 장비를 갖췄고, 기류를 거슬러 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군사 정보 시스템”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중국 정찰 풍선이 중남미 상공을 통과 중이라는 사실도 공개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정찰 풍선이 미국 대륙을 횡단한 후 격추된 초유의 사태로 미·중 관계는 당분간 얼어붙을 전망이다.

미 당국은 지난달 28일 알래스카주 알류샨열도 부근에서 미 영공에 진입한 중국의 정찰 풍선을 처음 탐지했다. 미 북부사령부는 당초 중국이 또 한 번 미국의 주변 방위망을 탐색해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중국은 정찰 작전을 위한 풍선 선단을 만들었고 5개 대륙에서 탐지된 바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 때 세 차례, 바이든 행정부 때 한 차례 미국 영토에 잠시 들어선 적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미사일 맞고 '펑' - 4일 오후(현지 시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해안가 상공에서 미 공군 F-22 랩터 전투기가 중국의 대형 정찰 풍선 주변을 비행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은 이날 오후 2시 39분 이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격추돼 폭발하는 정찰 풍선의 모습.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중 관계가 또다시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미국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방중을 취소했다. /로이터 뉴스1

알래스카를 거쳐 캐나다 북서부 지역을 떠돌던 풍선은 지난달 31일 아이다호주 북쪽을 통해 미국 영공에 재진입했다. 당시 미 국방부와 북부사령부 당국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풍선이 1일 몬태나주 빌링스 상공에 들어서자 미 국방부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맘스트롬 공군기지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운용하는 341미사일 비행단이 주둔하기 때문이다. 한 국방부 당국자는 이를 “노골적이며, 부실하게 은폐한 스파이 시도”라고 묘사했다.

필리핀을 방문 중이던 오스틴 국방장관은 1일 대책 마련을 위한 화상회의를 소집했고, 인구가 적은 몬태나주 상공에서 격추하는 방안이 잠시 논의됐다. 하지만 마크 밀리 합참의장, 글렌 밴허크 북부사령관이 버스 3대 크기(지름 27m) 대형 풍선에서 낙하하는 파편이 지상에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정찰 풍선으로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정적 가치”밖에 없다며, 서둘러 무리하게 격추하기보다 밀착 감시하고 추적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몬태나주 상공을 통과하는 풍선 사진이 공개된 이후 미국 내 여론이 들끓었다. 시민들이 풍선을 향해 총을 발사할 것을 우려한 노스캐롤라이나 개스토니아 경찰과 사우스캐롤라이나 요크 카운티 보안관실 등이 3일 ‘풍선은 6만피트(약 1만8300m) 상공을 날고 있다. 격추시키려 하지 마라. 총으로 쏴도 맞힐 수 없다’는 취지의 경고문을 공개할 정도였다.

공화당도 바이든 행정부를 강력히 압박했다.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2일 밤 “중국이 미국 주권을 뻔뻔스럽게 무시한 것은 반드시 대응해야 할 불안정한 행동이고, 바이든 대통령이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된다”며 “‘갱 오브 에이트’에 대한 브리핑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갱 오브 에이트’란 상원의 민주·공화 양당 원내대표, 하원의장과 소수당 원내대표, 상·하원 정보위원장과 소수당 간사 등 8명을 일컫는 말로 의회 내에서 가장 민감한 정보를 취급할 수 있는 이들이다. 로저 위커 상원 군사위 공화당 간사는 “국방부가 고고도 정찰 풍선의 영공 침범에 대응해 긴급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마이크 로저스 하원 군사위원장은 “백악관은 왜 스파이 풍선이 미국을 통과하도록 내버려뒀는지, 그 결정으로 우리 국가 안보에 어떤 손상이 발생했는지 답변해야 한다”고 했다. 마저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하원의원은 “바이든은 중국의 스파이 풍선을 즉시 격추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절대 묵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 국방부는 풍선이 해상으로 진입한 4일 격추 작전에 나섰다. 항공기 안전을 우려한 미 연방항공청은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 공항과 사우스캐롤라이나 머틀 비치, 찰스턴 공항 등 3곳의 항공기 이·착륙을 일시 중단시켰다. 직접 풍선을 격추한 F-22 랩터 외에 F-15 이글 전투기 등을 투입했고, 풍선의 잔해를 수거, 분석하기 위해 해군도 동원했다. 풍선이 추락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연안은 수심이 47피트(약 14.3m) 정도로 비교적 얕아, 잔해가 곧 수거될 것으로 미군은 보고 있다. 미 해군연구소(USNI)가 발행하는 ‘USNI 뉴스’는 무인 잠수정과 해군 잠수사가 투입될 예정이며, 연방수사국(FBI) 방첩 수사관들도 수색에 참여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