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자국 영공을 침범해 비행하다 격추된 중국의 ‘정찰 풍선’이 미국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동아시아, 유럽 등 적어도 5개 대륙의 상당수 국가에서도 탐지됐다고 8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9일 “중국은 40개국 이상에 정찰풍선을 띄웠고, 중국군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도 지난해 규슈의 공해 상공에서 소속 불명의 기구(풍선)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중국의 풍선이 일본, 인도, 대만, 필리핀 등 미·중이 각축전을 벌이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집중 비행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자 중국 풍선이 한국 영공도 침범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머틀비치 인근 해역에서 해군 폭발물 처리반 요원들이 최근 미국 영공을 무단 침범해 격추된 중국 정찰 풍선의 잔해를 보트에 옮겨 싣고 있다. 수거한 잔해는 분석을 위해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연방수사국(FBI) 연구소로 이송됐다. 미국 현지 매체들은 중국 정찰 풍선 사태로 미국인들의 반중(反中)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 해군

백악관을 비롯, 미 국무부와 국방부 등은 이날 일제히 브리핑을 갖고 이 같은 미 정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워싱턴DC 외신센터에서 “미국은 (중국의 정찰)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은 유일한 국가가 아니다”라며 “중국이 정찰 풍선을 보냈다는 사실을 해당 국가가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다. 중국의 정찰 프로그램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는 전 세계 동맹과 파트너를 접촉할 것”이라고 했다. 패트릭 라이더 국방부 대변인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적어도 라틴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유럽 등 5개 대륙에서 발견된 중국 정찰 풍선들은 ‘(군사) 정찰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며 “크기와 역량은 다양하다”고 했다.

CNN은 소식통을 인용, “(중국 풍선이)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에서 최소 24차례 (군사 정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 중 미국 영공에서는 6건의 비행이 이뤄졌다”고 했다. 나머지 18건은 다른 나라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 풍선들은 모두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중국) 부대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풍선이 단순 기상관측용”이라는 중국 측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지난 1일(현지 시각) 미국 몬태나주 빌링스 상공에 중국 대형 정찰 풍선이 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지난 2020년 6월 17일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아오바구 상공에 미확인 비행체가 떠 있는 모습. 풍선 아래쪽에 카메라와 태양광 패널로 추정되는 비슷한 모양의 물체가 부착돼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미군이 격추한 중국 정찰 풍선과 유사한 기구가 과거 일본에서도 수차례 목격됐다고 밝혔다. /로이터·AFP 연합뉴스

워싱턴포스트(WP)는 “정찰 풍선은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타국의 군사 자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운영해 온 대규모 정보 감시 프로그램의 일환”이라고 보도했다. 남중국해 인근 중국 하이난(海南)성을 본거지로 운영돼 2018년 이후 일본과 인도, 베트남, 대만, 필리핀 등을 포함해 중국의 전략적 관심 대상에 해당하는 지역의 군사 자산에 대한 감시 활동을 벌여왔다고 WP는 전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공개, 비공개 브리핑에서 중국 풍선의 한국 영공 침공 여부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커비 조정관은 ‘한국이나 북한에서도 중국 정찰 풍선이 발견됐느냐’는 질문에 부인하지 않은 채 “그런 대화는 동맹국들과 비공개로 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미군이 격추한 중국의 정찰 풍선과 유사한 기구가 자국 상공에서도 출현했다고 밝혔다.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9일 “규슈의 공해 상공에서 소속 불명의 기구가 발견됐다”며 “동맹국과 협력하면서 이 기구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 (중국과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2020년 6월과 2021년 9월에도 유사한 비행 물체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지난 6일 확인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자위대가 격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미 정부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중국의 ‘불법 정찰’ 행위를 공개하면서 미·중 갈등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AP통신 등은 “(이번 풍선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미·중 경색이 풀릴 것으로 보였지만, 이번 사태로 양국 모두 공방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여전히 해당 풍선들이 ‘기상관측용’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마오닝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 위협을 확대·과장하는 것은 중·미 상호 신뢰와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국을 더 안전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탄커페이 국방부 대변인은 “미국 측이 무력으로 중국 민용 무인 비행체를 습격해 국제 관례를 엄중하게 위반했다”며 “중국은 미국의 양국 국방 장관 통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태의 배경과 관련, “중국인민해방군이 앞서가는 라이벌인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군사 현대화에 매진하는 한편 기습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무기와 전략을 개발해 왔다며, 정찰 풍선도 그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이어 미 당국자를 인용해 “풍선은 정해진 패턴으로 지구궤도를 도는 위성과는 다른 장점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풍선에 간단한 카메라만 장착해도 궤도 위성보다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다른 정찰 장비를 실을 경우 위성보다 고도가 낮기 때문에 위성이 잡아낼 수 없는 신호 정보를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표면에서 더 가까운 곳을 날며 바람에 따라 방향이 바뀌는 풍선은 고정된 궤도를 도는 위성보다 군(軍)과 정보 당국이 예측하기가 더 어렵고, 레이더도 회피할 수 있다고 이 당국자는 설명했다. 궤도를 따라 계속 이동하는 위성과 달리 풍선은 특정 지점을 맴돌 수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