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큰 상업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예금인출(뱅크런) 사태와 주가폭락으로 순식간에 파산에 이르렀다. 스타트업들의 돈줄 역할을 해오던 SVB의 파산은 금융권 전반에 충격을 주는 것을 넘어 스타트업들의 줄도산까지 우려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10일(현지 시각)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FDIC는 ‘샌타클래라 예금보험국립은행(DINB)’이라는 이름의 법인을 만들어 SVB의 기존 예금을 모두 새 은행으로 이전하고, SVB 보유 자산은 매각하기로 했다.
FDIC의 조치로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의 예금보험 한도 이내 예금주들은 13일 이후 예금을 인출할 수 있게 됐다. 비보험 예금주는 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액에 대해 공채증서를 받아 갈 수 있다.
1983년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문을 연 SVB는 캘리포니아주와 매사추세츠주에서 17개 지점을 보유한 기술기업 전문 은행이다. FDIC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SVB의 총자산은 2090억달러(약 276조5000억원), 총예금은 1754억달러(약 232조1000억원)였다. 미국 16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SVB의 파산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문을 닫은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 이후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은행 파산이다.
SVB는 위기가 수면위로 부상한 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몰락에 이르렀다. 210억달러(약 28조원)어치 채권을 18억달러(약 2조3800억원) 손실을 보고 팔았다는 전날 발표가 폭탄의 뇌관이 됐다. SVB는 주로 스타트업들로부터 예금을 받아 IT 기업에 대출 등 자금 지원을 해왔는데, 경기 침체 우려로 예금이 줄면서 유동성(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현금화가 쉬운 채권을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채권은 금리가 오르면 가격이 내려가는데, 연방준비제도가 최근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인상하고 있는 탓에 채권 가격이 급락한 상태다.
발표 직후 주가는 60% 이상 폭락했고, 고객들의 예금 인출이 몰렸다. SVB는 22억5000만달러의 증자를 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회사를 매각하려 했으나 금융당국은 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파산으로 이어진 SVB의 위기는 이날 퍼스트리퍼블릭 은행과 시그니처 은행의 주가를 장중 20% 이상 떨어뜨리는 등 금융권 전반에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위기가 금융권 전체로 확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모건스탠리는 “SVB가 맞닥뜨린 현재의 압력은 매우 특이한 경우로 다른 은행들과 상관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반 은행들이 기술 분야 스타트업에 특화된 SVB처럼 갑작스러운 뱅크런에 직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SVB가 스타트업의 돈줄 역할을 해왔던 만큼 스타트업계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기술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 벤처 캐피털 산업의 중추인데, SVB는 그 중심에 있었다. 미국 테크·헬스케어 벤처기업 중 44%를 고객으로 두고 있었으며 2009년 이후 2300억달러(약 303조원) 규모의 투자유치에 참여했다.
이 때문에 재무 구조가 열악한 스타트업은 자금줄이 막혀 도산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예치금을 돌려받는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걸려 자금 융통이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들은 SVB로부터 자금 인출을 촉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