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공군의 MQ-9 리퍼 무인기가 우크라이나 인근 흑해 상공의 국제 공역을 비행하던 중 러시아군의 수호이 Su-27 전투기와 충돌해 추락했다고 미군 유럽사령부가 14일(현지 시각) 밝혔다. 미국 군용기가 러시아 전투기와 부딪혀 추락한 것은 냉전 종식 이후 처음이다.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군과 러시아군 간에 첫 충돌이 발생, 양국 관계 및 우크라이나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미군 유럽사령부는 이날 “러시아의 Su-27 전투기 두 대가 흑해 상공의 국제 공역 내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의 정보·감시·감시용 MQ-9 무인기에 대해 위험하고 비전문적인 차단 기동을 실시했다”며 “오전 7시 3분쯤 Su-27 전투기 한 대가 MQ-9의 프로펠러에 부딪쳤고, MQ-9는 국제 수역으로 추락했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는 MQ-9 무인기가 추락하기 30~40분쯤 전부터 러시아 전투기들이 근접 비행을 했으며, MQ-9 앞에서 비행하며 연료를 투하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전투기들이 정찰 작전 중이던 MQ-9 무인기를 위협하다가 우발적으로 충돌해 추락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백악관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으로부터 관련 보고를 받았으며 추락한 MQ-9의 회수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부는 이날 아나톨리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국제 공역에서의 위협은)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미국 측은 유럽·아프리카 주둔 미 공군이 정기적으로 동맹국 영공과 국제 공역을 비행하고 있으며 이날 추락한 무인기도 “통상적인 작전 중”이었다고 밝혔다. 미군 고위 당국자는 뉴욕타임스에 “MQ-9은 정기적으로 계획된 정찰 임무를 위해 이날 아침 루마니아의 미군 기지에서 출발했다”며 “MQ-9 리퍼 무인기는 헬파이어 미사일로 무장할 수 있지만 이 무인기는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군 유럽사령부는 러시아 측이 차단 기동에 나선 것이 “자신감 결여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 무인기가 비행 정보 발신기(transponder)를 끈 채 (러시아의) 특별 군사작전을 위해 설정·선포된 임시 영공 체계의 경계선을 넘었다”며 “미확인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전투기가 발진했다”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지점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러시아 측의 ‘임시 영공’ 주장에 미뤄보면 2014년 러시아가 불법 합병한 크림 반도 인근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국방부는 또 “(러시아 전투기와 미국 무인기의) 직접 충돌은 없었다”며 “미국 무인기가 급격한 기동을 하다가 고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수면에 충돌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팻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사건 당시 영상의 기밀을 해제해 공개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미국 측은 러시아가 이번 추락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복수의 미 당국자는 뉴욕타임스에 “이번 사건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찰기를 공격하려는 폭넓은 전략의 시발점이란 정보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 당국자들은 또 “러시아가 MQ-9의 프로펠러를 꺾어 놓으려고 의도했다고는 믿지 않는다”며 “이는 Su-27 전투기도 추락시킬 수 있는 위험한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미국 무인기에 대한 차단 기동이 “드물지 않다”며 지난 몇 주간 여러 차례 발생한 일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미·러 간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보여준 일로 평가된다. 영국 BBC는 “이번 사건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미국이 직접 대립할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군 유럽사령부도 이날 “러시아 조종사들의 공격적 행동은 위험하며, 오판과 의도치 않은 긴장 고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흑해 지역의 제해·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흑해 함대의 군함들을 전진 배치하고 있다. 흑해는 물론 북해와 지중해 지역에서의 군사 활동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월에는 러시아 북방 함대 소속 미사일 순양함과 공격 잠수함들이 냉전 종식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전술핵을 싣고 출항하고 있다는 노르웨이 군 정보국(NIS)의 보고서가 공개돼 미국과 서방 동맹국을 긴장시켰다. 이탈리아 해군은 지난달 “지중해와 흑해에 주둔하는 러시아 함정의 수가 냉전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증가했다”고 경고했다. 엔리코 크레덴디노 해군 참모총장은 당시 이탈리아 의회에 출석해 “(이탈리아·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NATO 동맹국과 러시아 간 우발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연일 ‘서방에 맞선 러시아의 결사 항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14일 러시아 극동 부랴트 공화국의 군용 헬리콥터 공장을 방문해 “특별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국가 존속이 걸린 문제”라며 “우리는 국가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쟁의 확대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