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의 실리콘밸리와 동부 워싱턴DC의 펜타곤(국방부). 멀게만 보였던 이들이 ‘중국의 도전’에 맞서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현지 시각) “펜타곤이 ‘방산업체 대열에 동참하라’며 실리콘밸리 첨단 스타트업에 구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군과 민간이 긴밀히 협력하는 중국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국방부가 첨단 스타트업에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는 민간 업체와 공동으로 무기를 개발하지만 보안 때문에 제한된 숫자의 대형 방위산업 기업으로 협력사를 제한해 왔다. 아울러 명분과 정치적인 올바름을 중시하는 실리콘밸리 IT(정보기술) 업계 또한 무기와 관련된 기술 개발엔 호의적이지 않았다. 2018년 구글과 아마존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드론 프로그램 동참을 계획하자 직원들이 극렬히 반발해 철회한 적이 있을 정도다.
무기 개발을 두고 긴밀한 협력이 어려울 듯했던 국방부와 실리콘밸리는 그러나 최근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일단 국방부는 지금의 무기 개발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소수의 방산 대기업이 정부 예산을 따낸 후 계약한 대로 연구·개발을 해서는 빠르게 기술을 따라잡기 어렵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국방부는 인공지능(AI)과 퀀텀(quantum·양자) 컴퓨팅, 신소재처럼 군사 목적으로 사용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에 벤처 캐피털 자본을 유치해 지원하고 키우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처한다는 계획이다. 실리콘밸리 첨단 기업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확대하기 위해 미 국방부는 지난해 말 ‘전략자본실’을 새로 만들었고, 올해 운영비로 1억1500만달러(약 1500억원)를 최근 의회에 요청하는 등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스타트업 업계도 ‘고자세’를 고수하기엔 상황이 달라졌다. 한때 IT 업계에 큰 돈벌이가 됐던 가상화폐 가치의 급등락, 전자상거래 시장의 포화 등으로 시장이 악화했다. 게다가 연방준비제도가 주도하는 금리 급등과 경기 둔화 조짐으로 자금난이 발생하면서 국방부의 제안이 반가운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해 전략자본실 신설 이후 국방부와 손을 잡는 스타트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방어·감시 시스템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앤듀릴 인더스트리즈가 프로젝트를 따냈고, 국방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스트라이더 테크놀로지도 최근 펜타곤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앤듀릴 인더스트리즈는 소셜미디어에서 자사를 “전통 국방 업체가 아닌 첨단 기술로 미군 능력을 향상시키는 업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민간 위성 업체 막사테크놀로지도 지난해 국방부 국가정찰국(NRO)과 30억달러 이상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비즈니스인사이더 등은 전했다.
미 국방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는 국방 강화와 경제 성장을 융합 추진하는 중국공산당의 ‘군민융합(軍民融合)’ 전략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은 외자를 투입하고 외국에 수출하는 민간 기업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을 만큼 민·관 구분이 모호하고 공산당의 통제가 집중된 사회다. 군민 융합은 이런 특징을 활용해 AI와 퀀텀 컴퓨팅, 반도체, 원자력, 항공·우주 등 민수(民需)와 군사 분야 양쪽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를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성장시키고, 핵심 최첨단 기술을 인민해방군이 독점해 군 현대화에 활용하는 전략이다. 스탠퍼드대 국가안보혁신센터의 스티브 블랭크 공동 창립자는 “중국이 이런 전략으로 1조달러(약 1300조원) 이상의 자본을 테크 분야에 투입하고 있다”며 “중국은 실리콘밸리처럼 조직돼 있지만, 미 국방부는 (쇠퇴한)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제조회사 같다. 이것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며, 변화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다만 시장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민간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프로젝트의 안정성이나 보안에 문제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부품 등의 하청을 준 기업이 경영을 잘못해 파산하거나 사고가 날 경우 방산 부품 공급 등에 차질이 생길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WSJ은 “이달 초 IT 기업의 예금이 많았던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해 직원 급여를 못 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자 국방부도 협력사의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이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에 급박하게 움직였다. 결국 연준과 재무부가 자금을 지원했지만, 은행 위기가 스타트업으로 확산했다면 국방부까지도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