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기소 결정이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내려진 후 미국의 민주주의가 한국과 비슷한 정치 보복과 분열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미 주요 언론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기소가 지난 수십년간 반복돼온 한국을 예로 들면서 트럼프 기소가 일회성 사건에 그치지 않고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분석 기사를 잇달아 내는 중이다. 미국은 전·현직 대통령이 기소된 전례가 없고, 문제가 불거지면 정치적 협상을 통해 해법을 찾는 방식을 취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기소가 확정되면서 이 같은 ‘합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국과 비슷한 ‘정치의 사법화’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부에선 전직 대통령에게 일종의 면책 특권을 줬던 미 정치권의 관행을 바꿀 때가 됐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전 성인물 배우(스토미 대니얼스)에게 성관계 폭로 입막음용 돈을 지급한 것과 관련한 뉴욕 맨해튼 대배심의 기소 결정을 두고 ‘한국’을 잇달아 언급 중이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가 한국의 박근혜,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전 총리)의 반열에 올랐다”며 “트럼프 기소로 200년 넘게 전 대통령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온 미국 민주주의가 시험에 빠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NYT는 지난 대선 때 적나라한 반(反)트럼프 입장에 섰던 민주당 지지 언론이지만 트럼프 기소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논조로 보도를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CNN, 시사 주간지 타임 등 주요 언론 또한 전직 대통령이 기소돼 사법 처리를 받은 해외 주요 사례로 한국을 꼽았다. WP는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들이 예외 없이 정치적 논란에서 촉발된 수사로 인해 수감되거나 기소 요구에 맞닥뜨리는 (정파 간) 보복 주고받기의 양상을 띤다”고 했다. 중도로 평가되는 USA투데이는 “2000년대 이래 78국에서 전직 수반이 기소됐으며, 이는 주요 민주주의 선진국에도 확대되는 추세”라고 보도했다. 한국 전두환·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이 수사받거나 복역한 내용을 정치와 사법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취지로 소개했다.
미국 정치권도 혼란에 빠졌다. 공화당은 “후진국적 현상”이라며 반발했고, 트럼프는 기소 결정 이튿날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대문자로 “미국은 이제 제3세계 국가가 됐다”고 썼다. 전 대통령 기소가 ‘정치 선진국’ 미국이 아닌, 부패와 내전이 만성화된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개발도상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뜻이다.
민주당 측은 대체로 “트럼프의 탈법 행위에 면책 특권이 주어져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내부에선 이번 기소가 정치 보복 악순환의 신호탄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한다. NYT는 “민주당 소속 검사장이 이끄는 맨해튼 지검이 트럼프를 기소했듯, 남부 주(州) 검찰이 공화당과 손잡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남미 국경 단속을 제대로 못 해 불법 이민자 폭증을 초래했다’는 식의 기소를 시도할 가능성이 충분해졌다”고 했다. 하버드대 역사학과 질 레포어 교수는 “전직 대통령 기소는 첫 한두번은 법치주의일 수 있지만, 반복되면 더 이상 법치가 아니게 된다”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기소가 민주당에 대한 역풍이 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고 있다. 바이든은 지난달 31일 트럼프 기소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할 말 없다”로 일관했다.
트럼프 기소 이후 그의 지지자들이 결집해 반발할 조짐도 보이는 상황이다. 트럼프 측은 이번 기소에 대한 미국인들의 당혹감을 지지층의 분노로 전환, 2024년 대선에서 정치적 현금화 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기소 결정이 난 지난달 30일 하루에만 미 전역에서 트럼프에게 후원금이 400만달러(약 52억원)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 중 25% 이상이 첫 후원자였다고 트럼프 측은 밝혔다.
트럼프는 지난달 중순부터 기소가 예상되자 전국 지지자들에게 ‘마녀 사냥에 맞서 여러분의 편에 서겠다’는 이메일을 보내고 후원금 모금 창구를 확대했다. 또 향후 재판 지연 작전을 통해 기소 정국을 내년 대선까지 끌어가겠다는 전략이다. 트럼프의 조 타코피나 변호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최대한 홍보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오는 4일 오후 뉴욕 맨해튼 법정에 기소 인정 절차를 위해 출석하는 사건은 미 정치의 변곡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3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를 떠나 뉴욕에서 묵고 다음 날 법정에 출석하기로 했다. 수갑은 차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법정 안에 들어가 비공개 상태에서 머그샷(용의자 촬영 사진)을 촬영하고, 지문을 찍는 등 일반 형사범죄 용의자가 밟는 절차는 거의 거칠 예정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한다. 만약 트럼프의 머그샷이 유포된다면 이는 ‘전직 대통령 기소’라는 역사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게 된다.
공화당은 맨해튼 지검에도 총공세를 펴고 있다. 연방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 소속 법사위·감독위·행정위원장 3명은 지난달 트럼프 수사 자료를 제출하라는 요구 서한을 앨빈 브래그 지검장에게 두 차례 보냈다. 이에 대해 맨해튼 지검은 답장을 보내 “우리 수사가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한편 트럼프 기소의 핵심 방아쇠가 된 전직 포르노 배우 대니얼스는 31일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온갖 욕설과 ‘죽이겠다’는 폭력적이고 생생한 협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향후 증인으로 트럼프와 대면할 가능성에 대해 “벌거벗은 트럼프도 봤는데 옷 입은 트럼프가 더 무서울 수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