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잉원(왼쪽) 대만 총통과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 의장이 5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미밸리의 로널드 레이건 도서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해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 의장의 대만 방문에 이어 미국과 대만의 고위급 교류가 이어지자 중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로이터 연합뉴스

케빈 매카시 미국 연방하원의장이 5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를 찾은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만났다. 글로벌 패권을 둔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가 굳어지는 가운데 대만 수장이 미국 땅에서 ‘권력 서열 3위’와 회동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1979년 단교했으며, 매카시(공화당)는 단교 후 44년 만에 대만 총통이 미국 땅에서 만난 최고위 인사가 됐다.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이어 또다시 미국과 대만 간 고위급 교류가 이뤄진 데 대해 중국은 “단호하고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며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2시간여 이어진 회동에는 민주·공화 양당 의원 17명으로 구성된 미 의회 대표단도 참석했다. 사사건건 대립하다가도 반중(反中) 노선에서만큼은 한목소리를 내는 미 의회의 최근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회동 후 차이 총통과 공동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매카시 의장은 “우리의 유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대만과 미국 국민 간의 우정은 자유세계에 심원한 중대성을 갖는 문제이자 경제적 자유, 평화와 역내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차이 총통은 “함께할 때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미국 의원들의) 존재와 한결같은 지지는 대만인에게 우리가 고립돼 있지 않으며 혼자가 아니란 것을 확인해 준다”고 말했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의 일부로 보는 중국은 날 세워 미국을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 측이) ‘대만 독립’ 분열 분자가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미국과의 공식 교류를 전개했다”며 “결연하게 반대하고 강렬하게 규탄한다”는 성명을 냈다. 또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 중의 핵심”이라며 “중국 측은 국가 주권과 영토 완정(完整·통일)을 수호하기 위해 단호하고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측이 대만 남동쪽에서 훈련 중인 항공모함 산둥호 등을 동원해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차이잉원(왼쪽) 대만 총통과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 의장이 5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미밸리의 로널드 레이건 도서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매카시 의장과 차이 총통의 이날 회동은 캘리포니아주 시미밸리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기념 도서관’에서 이뤄졌다. 레이건은 1967년 “자유가 말살되는 데는 한 세대 이상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매 세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지켜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재임 당시 ‘힘을 통한 평화’를 주창하며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중 간의 관계가 ‘신냉전’으로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날 장소 선택은 대만을 ‘자유를 힘’으로 지켜내겠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날 차이 총통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또다시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세계에 있다”면서 레이건의 취임사 발언을 인용했다. 매카시 의장은 “우리의 논의는 적절하게도 레이건 대통령의 애국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평화와 자유에 대한 결의를 담은 곳에서 이뤄졌다”며 “이런 가치들은 언제나 대만과 우리의 우정에 기반이 돼왔다”고 말했다. 마이크 갤러거 미 하원의원(공화당)은 “보복을 두려워하는 자는 악마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셈”이라는 레이건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는 (중국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매카시 의장은 이 자리에서 대만에 대한 무기 제공을 강조했다. 미 의원들과 별도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를 계속해야 하며 이것이 대만에 시의적절하게 도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의 목표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가설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게 막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억지할 수 있는 무기 공급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크라이나(전쟁)를 통해 배운 중요한 교훈”이라고 덧붙였다.

단교 44년만에… 미국서 만난 대만 총통과 미국 하원의장 -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심해진 가운데 5일(현지 시각) 차이잉원(오른쪽에서 둘째) 대만 총통과 미국 권력 서열 3위 케빈 매카시(왼쪽에서 둘째) 하원 의장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에서 회담하고 있다. 대만 총통이 미국 현지에서 하원 의장과 회동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이 대만과 단교한 1979년 이후 미국에서 만난 양국 인사 중 최고위급으로 꼽힌다. /로이터 뉴스1

이런 강경 발언에도 뉴욕타임스는 이날 회동이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위기를 촉발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 공세적이 되는 중국에 맞서려는 미국의 저글링(juggling·곡예)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피하기 위해 매카시 의장이 대만에 가서 차이 총통을 만나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차이 총통이 과테말라·벨리즈를 방문하고 나서 ‘경유’하는 형식으로 캘리포니아에 들르는 타협을 했다는 것이다. 매카시 의장은 지난해 중간선거 유세 과정에서 공화당이 다수당 지위를 되찾아 하원의장이 되면 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대만에 가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아직 이 약속을 지키지는 않았다. 다만 매카시 의장은 이날 회동이 자신의 대만 방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날 회동이 이뤄진 레이건 도서관 주변에서는 대만을 지지하는 시위대와 중국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대립했다. 대만을 지지하는 소수의 시위대는 도서관 입구에서 “대만 힘내라”는 구호를 외쳤고, 근처에선 중국을 지지하는 이들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흔들며 회동을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