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낙태 수단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경구용 낙태약 미페프리스톤. 보수 성향 텍사스주 연방법원이 이 약의 FDA 승인을 23년만에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반면 워싱턴주 연방법원은 FDA 승인을 유지하는 결정을 내려, 당분간 법원 내에서 충돌하는 판례를 둘러싼 법리 논쟁과 항소 등 추가 소송이 이어질 전망이다. /AFP 연합뉴스

여성들이 23년간 광범위하게 써온 경구용 낙태약 사용을 미국 연방 법원이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지난해 6월 연방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은 결정 이래 낙태 규제와 관련한 가장 논쟁적 판결로, 미 사회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텍사스주 애머릴로 연방 법원은 지난 7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시판되는 사실상 유일한 낙태 약인 미페프리스톤에 대해 2000년 식품의약국(FDA)이 내린 사용 승인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FDA가 23년 전 약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연방 법원이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이 판례는 미 전역에서 비슷한 판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연방 법무부는 즉각 항고하겠다고 밝혔다.

미페프리스톤은 임신 10주(70일)까지 사용하는 약물로, 미 전역의 연간 낙태 건수(약 100만건)의 절반 이상에 사용된다. 원격 처방을 받아 통신판매 약국에서 우편으로 받거나, 일반 동네 약국에서도 약을 탈 수 있다. 혈액검사상으론 낙태 약을 먹었는지 자연유산인지 구별할 수 없다.

지난 2월 경구 낙태약에 대한 식품의약국(FDA) 승인 취소 여부를 검토하는 텍사스주 연방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여성 낙태권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AP 연합뉴스

지난해 대법원이 1973년 이래 유지돼 온 전국 단위의 낙태권 보장 판례를 깬 뒤 각 주가 낙태 금지 여부를 정할 수 있게 되면서, 50주 중 12주가 낙태를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낙태가 금지된 주에 사는 여성들도 비밀리에 미페프리스톤을 배송받아 쓰면서 수요가 치솟자, 보수와 진보 진영 낙태 전쟁의 다음 최전선은 이 약이 됐다. 지난 1월 바이든 정부의 낙태권 보장 방침에 따라 FDA가 일반 소매 약국에서 미페프리스톤 판매를 허용하자, 2월 공화당 성향 주 정부들이 약국 체인에서 이 약의 판매를 막고 FDA 승인을 취소하는 소송을 냈고, 민주당 성향 주 정부들은 이에 맞서는 소송을 냈다.

낙태 반대론자들의 FDA 승인 취소 요청에 손을 들어준 텍사스 법원의 결정이 나오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여성의 자유를 박탈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라며 “이 결정을 뒤집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같은 날 워싱턴주 연방 법원은 ‘FDA가 미페프리스톤 사용 승인을 변경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법원 내 판례가 충돌하기 때문에 향후 추가 소송전과 법리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당은 잇따른 낙태 규제에 대한 여성들과 중도·진보층의 반감이 내년 대선을 좌우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쟁점화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바이든 정부 심판론’이 희석된 가장 큰 이유가 대법원의 낙태권 백지화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