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여섯 개와 주사용 펜이 들어 있어요. 바늘이 정말 가늘고 반짝이네요. 곧 살이 빠지겠지요?” 최근 소셜미디어 ‘틱톡’에 올라온 한 미국인의 동영상은 첨단 전자 기기처럼 ‘오젬픽’이란 약의 포장을 ‘언박싱(신제품 개봉)’하는 장면을 담았다. 이 약은 원래는 당뇨 치료제이지만 요즘 미국에선 비만 치료용으로 더 많이 쓰인다. 미국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급격하게 체중을 줄여주는 비만 치료 약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소셜미디어에서 운동·식단 같은 다이어트 단골 소재가 비만 약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2021년 하반기 미국에서 위고비·오젬픽·트루리시티 등 비만 치료에 큰 효과를 보이는 주사제가 출시되고 관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다이어트 산업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미국의 비만 인구는 전체의 42%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10일(현지 시각) “1980년대 여배우 제인 폰다의 에어로빅 비디오부터 최근의 체중 관리용 스마트폰 앱까지, 다이어트 산업은 운동과 식단 관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오젬픽·위고비 등 비만 약의 인기가 치솟으며 전통적인 다이어트 업계가 생존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고 했다.
운동, 식단 관리 등을 합친 전통 다이어트 산업 규모는 760억달러(약 100조7000억원) 정도다. 투자은행 제프리스는 2031년까지 비만 약 시장이 1500억달러를 넘어서며 기존 다이어트 시장의 두 배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약들에 쓰이는 성분은 ‘GLP-1′로 본래 용도는 당뇨 치료다. 음식을 먹을 때 장에서 나오는 포만감 호르몬을 모방해 적게 먹어도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한다. 이런 효과가 체중이 줄게 하는 예상외의 긍정적 부작용을 유발해 최근엔 비만 약으로 더 많이 소비된다. 주 1회 주사하면 3~6개월 만에 체중이 15% 이상 줄어든다고 알려지면서 지난해에만 100억달러어치가 팔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부터 모델 킴 카다시안, 가수 아델 등 유명인들이 위고비 등으로 감량했다고 한다.
‘비만 약의 킹콩’이라 불리는 마운자로가 FDA(미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아 내년 초 출시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약을 통한 다이어트’의 시장을 키울 가능성이 큰 요인이다. 비슷한 원리로 작용하는데 체중 감량 효과가 약 23%로 더 크다고 알려졌다.
비만 약의 약진에 타격을 받은 기존 다이어트 업계는 전략을 수정하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식단 등 생활 방식 개선을 컨설팅해 주는 미 최대 체중 관리 서비스 업체 ‘웨이트워처’는 서비스 이용자 수가 2020년 503만명에서 최근 350만명 아래로 급감하자, GLP-1 기전 비만 약을 처방하는 원격 의료 업체 ‘시퀀스’를 1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지난 10일 발표했다. 웨이트워처를 통해 약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골드만삭스가 이 인수를 ‘실적 전환의 촉매제’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내자 2018년 대비 90% 하락해 있던 웨이트워처 운영사(WW 인터내셔널)의 주가가 11일 60% 폭등했다.
온라인 다이어트 관리 업체 ‘눔’도 비만 약 공급 서비스를 도입했다. 몇몇 서비스 이용자에게 앱을 통해 비만 약을 주문할 수 있도록 한 시범 프로그램을 최근 내놓았다. 기존의 식욕 억제제나 지방 분해 성분이 든 다이어트 보조제 등은 신약에 밀려 수요가 급감하자 30~50%씩 ‘폭탄 세일’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 반면 뉴욕·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 부촌(富村)의 피부과·성형외과 등은 매출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비만 약의 빠른 효과로 단기간에 살이 너무 많이 빠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 피부가 처지고 늙어 보여, 시술을 요구하는 이가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내에선 이 약들을 다이어트용으로 아직 구할 수 없지만 일부 임상 시험이 진행되는 등 출시를 앞두고 있다. 한편에선 이 약들을 만능으로 단정하기 이르다는 평가도 나온다. 오젬픽의 한 달 주사 값은 892달러(약 118만원)에 달할 정도로 가격이 너무 비싸 대중화하기 어렵고, 약을 끊으면 체중이 원상회복될 가능성이 크다.
부작용 우려도 있다. 구혜연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메스꺼움 증상이 흔하게 나타나고 소화불량·설사·변비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영민 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비만 상태가 아닌 사람이 조금 더 날씬해지려고 이런 약들을 오·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이미 미국에서 인기를 끌면서 약이 품귀 현상을 빚어 정작 필요한 환자들이 복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