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극우의 아이콘으로 통한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터커 칼슨(53)이 24일(현지 시각) 전격 해고됐다. 폭스가 2020년 대선(大選) 부정 음모론의 근거였던 ‘도미니언사 투·개표기 조작설’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황금시간대 ‘터커 칼슨 투나잇’ 쇼 등을 통해 줄기차게 방송한 대가로, 지난 18일 약 1조원대 명예훼손 배상금을 물어주기로 합의한 지 엿새 만이다.
폭스는 이날 짧은 성명을 내고 “칼슨과 갈라서기로 상호 합의했다. 그의 마지막 방송은 지난 금요일이었다”고 밝혔다. 칼슨에겐 발표 10분 전에 해고를 통보했다고 한다. 지난 6년간 미 케이블 뉴스 프로그램 중 1위 시청률과 최대 광고 수익을 폭스에 몰아줬던 스타와의 결별로선 참혹하다는 평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폭스가 칼슨을 버린 건 단순히 가짜 뉴스를 떠들어 회사에 손실을 입힌 죄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이번 명예훼손 소송에서 법정 증인으로 나섰을 때 모든 책임을 회사에 떠넘기며 배신한 것을 알게 된 게 결정타였다고 한다.
앞서 도미니언이 재판 증거로 제출한 폭스 수뇌부 대화록에선 루퍼트 머독 폭스 회장과 칼슨이 “개표기 조작설은 헛소리”라고 하면서도, 극우 시청자를 잡아두기 위해 대선 음모론을 밀어붙이기로 한 정황이 나온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칼슨이 허위 보도를 이끌었고, 사실 보도를 요구하는 기자를 해고하도록 했다. 칼슨은 자신의 쇼에 선동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을 공격하자 그들을 ‘희생자’ ‘순교자’로 치켜세웠다.
칼슨은 보수계에서 트럼프 다음가는, 혹은 그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 스타파워를 지닌 인물이다. “트럼프 연설 메시지를 미리 알려면 칼슨 쇼를 보라”는 말이 파다했고, 트럼프가 2019년 김정은과 정상회담 할 때 유일하게 밀착 취재해 ‘외교 비선 참모’로도 불렸다. 트럼프 낙선 후엔 칼슨을 공화당 대선후보로 뽑자는 여론도 일었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자신을 홍보한 칼슨은 사석에선 “트럼프를 격렬히 증오한다”고 했다고 한다.
칼슨은 트럼프 당선 직전인 2016년부터 금요일 저녁 뉴스쇼를 맡아 백인우월주의와 반(反)이민주의, 반(反)엘리트주의를 기본 골격으로 진보 진영의 정치적 올바름을 공격하며 인기를 끌었다. 독일 이민자 후손으로 ‘금수저’ 출신인 그는 중남미·아프리카 이민자를 겨냥해 “이민이 미국을 더럽고 가난하게 만든다”고 하고, 출산율 높은 히스패닉이 백인을 밀어낸다는 ‘인종 대교체론’을 주장하며 “백인이 억압받는 계층”이라고 했다.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민주당 의원에겐 “흑인임을 내세워 명문대에 간 인간”이라고 하고, 공군 여군 조종사용 임부복이 도입되자 “군대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막말했다. 지난해 BTS가 백악관을 찾았을 땐 “아시아 혐오를 비판하러 온 애들이 미국의 급을 낮춘다”라고 조롱, BTS 팬클럽(아미)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코로나 백신을 “나치의 의학 실험”으로, 자녀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이들을 “아동학대범”으로 불렀다. 중국을 증오하면서도 같은 권위주의 정권인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에겐 유독 관대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도 푸틴 편을 들며 서방 나토(NATO) 동맹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비난했다. 24일 칼슨 해고 뉴스가 나오자마자 러시아 국영방송사(RT)가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트윗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