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1875~1965)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 제기된 ‘친일 인사’ ‘미국의 앞잡이’ 등 이른바 4대 주장에 대해 미국의 대표적 외교·역사학자들은 “과거사의 정치화(化)”라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왜곡”이라고 했다. 28일(현지 시각) 국가보훈처가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워싱턴DC 조지워싱턴대에서 개최한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 좌담회에는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석좌교수, 그레그 브레진스키 조지워싱턴대 교수, 데이비드 필즈 위스콘신대 동아시아 센터 부소장 등이 참석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이 이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와 관련해 질문하고, 한종우 한국전쟁유업재단 이사장이 답변을 정리·요약했다.
스툭 교수는 “해방 이후 수많은 변수와 위협 조건들이 엄존했던 상황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농지개혁 등을 성공시키면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것은 인정해야 한다”며 “이승만이 만들어 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현재도 (한미동맹에서) 핵심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필즈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의 인생에는 집권 연장 등 결점도 있었지만, 조국을 위해 희생한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며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을 옹호한 점,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집념과 농지개혁 등은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존경할 수 있는 이유들”이라고 했다.
미국 교수 3명은 ‘친일 인사’ ‘미국의 앞잡이’ ‘분단의 원흉’ ‘전쟁 때 국민을 버리고 도망’ 등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른바 ‘4대 주장’에 대해 “상당수는 당시 상황을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거나, 이미 드러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왜곡”이라고 했다.
스툭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이 친일 인사였다는 좌파 학계의 주장에 대해 “한국은 과거를 ‘정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이승만은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친일 청산에 소극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박민식 처장 질문에 스툭 교수는 “프랑스의 영웅 드골도 1945년 구성한 임시정부에 ‘나치 괴뢰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은 비시 정부 가담자들을 포함시켰다”며 “나치 협력자들을 다 축출할 경우 나라를 운영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프랑스는 나치 점령을 4년 동안만 받았는데도 그렇게 했다. 한국은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다”고 했다. 브래진스키 교수는 “같은 이유로 미 군정은 이승만보다 이른바 ‘친일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했고, 일제강점기의 행정 체계를 다시 세웠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미국의 국가 이익을 추종하면서 조국은 내팽개쳤다는 이른바 ‘미국의 꼭두각시’ 주장에 대해 브래진스키 교수는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며 “그를 미국의 ‘앞잡이(stooge)’라고 부르는 건 북한, 중국 당국이 만든 문서 외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오히려 이승만은 한반도 통일 등 목적을 위해 미국의 입안자들을 휘둘렀다(manipulate)”고 했다. 필즈 교수는 “6·25전쟁 당시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이승만의 ‘비타협성’을 이유로 그를 제거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라고 했다.
이들은 ‘6·25전 발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왜곡”이라고 했다. 필즈 교수는 “당시 미국 측은 ‘일본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절대 안 된다. 죽어도 한반도에서 죽겠다’고 했다. 이를 ‘도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했다. 스툭 교수는 “이 전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생포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데 대해서도 스툭 교수는 “한반도 분단은 미·소 열강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며 “‘이승만이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한국 내 좌파 세력의 비판 중 가장 큰 문제는 ‘김일성이 이미 이북에서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대안이 무엇이냐’는 데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이승만은 결코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당시 미·소간 협상도 지지부진했고, 미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를 실시해 좌파 리더가 당선되는 것을 허용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필즈 교수는 남한과 북한의 농지개혁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경우 무상분배한 땅 크기가 너무 작아 농민들이 세금을 낼 수가 없었고, 세수가 부족해진 북한 정부는 농민들 땅을 집단 농장화했다”고 했다. 사실상 북한 농민들이 북한 정권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필즈 교수는 “반대로 남한은 자작지(自作地) 비율을 계속 늘려 대부분의 자작농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