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의 극장가인 브로드웨이 44가의 ‘스타라이트(Starlite) 델리’. 샌드위치와 커피 등 간이 식사를 팔던 이 식당의 한인 사장 김정민(71)씨는 이날 셔터를 내리고 식재료와 조리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달 말 폐업한 가게를 청소하러 나온 것이다.
김씨가 약 40년 전부터 해오던 식당을 닫는다는 소식은 지난달부터 현지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다. 단골이었던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이 “집밥 같은 따뜻한 음식으로 우리를 먹여 살린 분”이라면서, 뮤지컬 배우 200여 명이 ‘감사의 합창’ 거리 공연을 선사했고 그의 ‘은퇴 기금’ 모금까지 펼쳤다. 미식의 도시 뉴욕에서 멋진 새 식당의 ‘개점’이 아닌, 허름한 샌드위치 가게의 폐점이 뉴스가 되는 건 드문 일이다. 한 매체는 스타라이트 델리 폐업을 두고 “뉴욕 역사의 한 장이 커튼 뒤로 사라진다”고 표현했다.
김씨는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내가 매일 끼니 해 먹인 배우들이 작별 노래를 불러주는데 너무 놀라고 고마웠다”며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아내는 결국 터뜨리더라”고 말했다. “이 업계 사람들은 ‘굿바이(안녕히)’란 말 대신 ‘어디선가 다시 만나요’라고 해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답죠.”
단골들 “당신 덕에 힘든 시절 이겨내”
1시간 30분가량 진행한 인터뷰 동안 대화를 수시로 멈춰야 했다. 5분이 멀다 하고 이웃 가게의 사람들과 배우·제작진, 뉴욕의 직장인 등이 들러 식당 문을 두드렸다. 폐업 보도를 보고 인사하러 온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문 닫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밥 먹으러 왔다가 놀라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김씨를 끌어안았고 “나 이제 어디 가서 밥 먹죠?” “당신 덕에 힘든 시절 이겨냈어요” “항상 고마웠어요. 건강하세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지인들은 그를 ‘미스터 민’, 혹은 ‘미스터 M’이라 부른다. 그와 관련한 기사와 소셜미디어 등의 댓글엔 ‘미스터 민’에 대한 추억과 찬사가 계속 달리고 있다. “가끔 돈이 없을 때는 ‘나중에, 나중에 내’라며 음식부터 건네주곤 했다” “노숙인들에게도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주더라” “브로드웨이는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왔다” “미스터 민 같은 사람들이 박수받는 게 미국”이란 식이다. 김씨는 이에 대해 덤덤히 답했다. “배고픈 젊은이들이 ‘주급을 못 받았다’ ‘지갑이 없다’고 하는데 안 먹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숙자는 그날 못 팔고 처분해야 하는 음식을 나눠준 겁니다. 내가 큰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김씨는 1952년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배고픔과 가난이 싫어 제약사 판매직으로 일하다 1981년 미국으로 향했다. “6·25의 잿더미 속에서 1970년대까지도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먼저 뉴욕에 건너온 형님이 ‘여긴 일자리 많고 열심히 하면 금세 자리 잡는다’고 해서 따라왔죠. 그 후 미국은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한국은 정말 많이 발전했습디다. 몹시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당시 이민 1세대가 그렇듯 무작정 미국에 도착해, 별다른 기술과 인맥이 필요 없는 일부터 닥치는 대로 했다. 비슷한 생각으로 고국을 떠난 이민자 청년 다섯 명이 작은 셋방 하나를 얻어 살았다. 번갈아 쪽잠을 자면서 식료품점과 잡화점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종잣돈을 모아 서울에서 중매로 만난 아내를 데려오고, 1984년 지금 자리에 식당을 내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궜다.
하루 4시간 자며 꿈 이룬 ‘이민 1세대’
-그간 어떻게 일했나.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식당을 열었다. 여긴 일찍 출근하는 회사원으로 시작해 배우·직원·관람객·관광객 등 손님이 종일 끊이지 않는다. 50㎞ 떨어진 롱아일랜드의 집에서 통근하느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고 밤 12시 넘어 잠들었다. 퇴근 때는 너무 피곤해 쓰러진 나 대신 아내가 운전대를 잡곤 했다. 그렇게 자식 셋을 키웠다. 그게 부모 아니겠나.”
-낯선 미국에서 자리 잡기 힘들지 않았나.
“미국인 대부분은 자기가 받은 게 있으면 꼭 갚고, 약속을 지킨다. 한국인의 정(情)과는 좀 다른데 깊숙이 들어가면 의리랄까, 이웃에 대한 신뢰 같은 게 있다. 나도 그 덕에 버틴 것 같다.”
-동양인 차별이 지금보다 심하지 않았나.
“동양인 비하하는 말을 종종 듣긴 했다. 하지만 차별 없는 곳이 어디 있나. 그런 것만 마음에 두면 견디기 어렵다. 그냥 털어내야지.”
-요리를 배웠나.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그냥 미국 사람들이 뭘 잘 먹나, 다른 식당선 뭐가 잘 팔리나 어깨너머 보고 따라 하며 시작했다. 먹는 장사는 한눈팔면 안 된다. 제시간에 신선한 재료로 약속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한때 직원을 18명까지 두고 낮·밤 교대 조로 식당을 운영하며 키웠다.”
-애써 일군 식당을 접게 돼 아깝지 않은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타격을 많이 받았다. 가게 임차료부터 음식 재료비, 인건비가 다 크게 올랐는데 손님한테 전가할 수도 없고, 나이가 드니 지치기도 했다.”
김씨는 아직 식당에 애정이 많아 보였다. 특히 뮤지컬에 대한 추억이 많은 듯했다. 그는 “처음엔 사실 브로드웨이가 뭔지도 몰랐다. 목 좋은 곳에 자리가 나서 가게를 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 얘기를 들으며 내가 어떤 사람들 상대로 장사하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흥미를 갖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제작진이 “바로 앞이니 보러 오라”며 초청 표를 줘 보러 갔다. 차츰 신작이 궁금하거나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을 때 표를 사서 관람한 적도 많아졌다. ‘오페라의 유령’은 네 번 봤고, 최근 35년 만의 고별 폐막 공연에도 제작진이 특별히 초청 표를 줘 다녀왔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론 “인간의 내면을 여러 측면에서 그려냈다”며 ‘시카고’를 꼽았다. 식당 내부엔 뮤지컬 관계자들이 빼곡하게 서명해 김씨에게 선물한 공연 포스터와 기념품, 감사패 등이 가득했다.
프로들은 글루텐·열량 계산해 주문
- 세계 최고 배우들은 어떻게 먹나.
“단골 중 10% 정도는 글루텐이나 지방, 열량 등을 엄격히 제한하는 배우들이다. 이들을 자주 보면서 얼굴만 봐도 필요한 것을 바로 만들어줄 수 있게 됐다. 프로는 식사를 비롯해 사소한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장사 끝내고 밤늦게 뮤지컬을 보면 무대 구성부터 조명, 의상, 배우들 몸 상태까지 세세한 것이 눈에 다 들어왔다. 이야기에 빨려드는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스토리’를 꼽으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어린이를 위한 좋은 스토리를 갖춘 뮤지컬을 만드는 데 참여해 보고 싶다”고도 했다.
-미 언론 인터뷰에서 ‘은퇴하면 실컷 자고 싶다’고 했는데.
“그건 농담이었고, 사실은 책과 신문을 마음 놓고 읽는 게 소원이다. 특히 책을 많이 읽으려 한다. 경제·역사·사회의 팩트(사실)가 담긴 책들을 좋아한다. TV도 토론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그동안은 먹고사는 데 바빠 그런 공부를 마음 편히 할 기회를 못 가졌다. 영어 공부도 더 하고 싶다.”
-영어는 이미 잘하지 않나.
“깊이 있는 내용을 담은 말을 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데 단어도 아직 모르는 게 많고 영어가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느낀다. 지역 대학을 찾아가 ‘고급 영어’ 강의를 수강한 적 있는데 좀 더 해보고 싶다.”
김씨의 딸과 두 아들은 대학에서 심리학과 경영학 등을 전공하고 현재 뉴욕, 텍사스, 보스턴에서 컴퓨터그래픽, 조직 관리 등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삽니다. 저보다 나은 삶이지요. 정말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