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경제·인권 등 각 분야에서 중국과 서방 진영 간 갈등이 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서방국가들을 중심으로 대만의 국제기구 활동을 공개 지지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현직 국무장관, 집권당 실세, 전 총리 등 중량감 있는 인사들의 ‘대만 챙기기’ 행보가 잇따르면서, 1971년 유엔 퇴출 뒤 중국 공세에 밀려 국제사회에서 설 땅을 잃었던 대만의 본격적인 복귀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오는 21~3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세계보건기구(WHO) 연차총회인 세계보건총회(WHA)에 대만을 ‘옵서버(참관인)’로 참가시켜야 한다는 성명을 9일(현지 시각) 발표했다. 블링컨 장관은 “대만의 옵서버 초청은 국제 보건 협력에 있어 WHO가 모든 이들의 건강을 신경 쓰는 포용적 접근법을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하나의 중국 정책과 일치한다”고 했다. 세계 공중 보건 협력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지만, 대만의 국제적 입지를 다져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만 중국이 대만의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데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도 친중국 인사라는 점 때문에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 외교 사령탑이 공식 성명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점 때문에 WHO가 중국의 눈치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앞서 미국과 대만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달 워싱턴에서 대만의 국제기구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공동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WHA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총회 등의 대만 참석을 지지해 주기로 약속했다.
일본도 대만의 국제기구 복귀 지지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만을 방문한 일본 집권 자민당의 스즈키 노리카즈 중의원 의원은 4일 차이잉원 총통과 만나 “일본 정부는 대만의 WHA 옵서버 참여를 전폭 지지하며, 대만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고 대만 공영 RTI방송이 보도했다. 앞서 지난달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열린 G7(7국) 외교장관회의에서도 의장국 일본의 주도로 “대만이 세계보건총회와 WHO 기술회의를 포함한 국제기구에 의미 있게 참여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공동 성명을 냈다.
영국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오는 16~20일 대만을 방문해 차이잉원 총통 등 고위 인사들과 만난다. 트러스 전 총리는 “대만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등대다. 중국 정권의 갈수록 공격적인 행동과 발언에 맞서 대만 국민들과 직접 만나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영국 전 총리의 대만 방문은 1996년 마거릿 대처 이후 27년 만이다.
대만 역시 적극적이다. 한국의 대만 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는 10일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대만의 WHA 옵서버 참여를 지지하고, 대만의 WHO 모든 회의, 활동 및 메커니즘 참여 제도화에 협조해 주실 것을 요청드린다”며 WHO를 시작으로 한 국제기구 복귀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대만은 1971년 중국에 밀려 유엔에서 쫓겨나면서 WHO와 ICAO 등 주요 국제기구의 회원 자격도 상실했다. 친중 성향의 마잉주 전 총통이 집권해 양안 관계가 좋았던 2009~2016년에는 옵서버 참석 등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2016년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차이잉원 현 총통이 취임한 후로는 이마저도 철저히 봉쇄됐다. 그러나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서 중국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 제공국으로 지탄받은 반면, 대만이 방역 모범국으로 조명받으면서 대만의 국제기구 활동 재개에 대한 호의적 여론이 형성됐다.
이런 기류에 힘입어 대만은 국제기구 활동 재개를 적극 모색해왔고, 일본·호주·캐나다 등 서방국이 주도하는 무역협정 CPTPP에도 가입 신청서를 냈다. 이런 대만의 숙원을 풀어주려는 듯 서방국가들이 일제히 대만 지지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남중국해 군사 활동과 반도체 수출 통제 등 각종 현안에서 서방과 중국의 대립 구도가 이어질 경우 서방의 ‘대만 띄워주기’는 지속되고 대만의 행보도 한층 과감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차이잉원 총통은 8일 미주대만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 미국과 진행 중인 양자 간 무역 협상이 타결되면, 다음 단계로 미국과 (국가 대 국가로 체결하는) FTA 추진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에 중국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대만의 WHA 옵서버 초청 추진과 관련,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10일 “미국이 대만이란 카드로 중국을 압박하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중국 내 대만 담당 부서인 국무원 대만판공실은 “대만이 옵서버 신분으로 과거 WHA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전제로 양안이 협상했기 때문”이라면서 “민진당이 지속적으로 ‘대만 독립’ 입장을 고수할 경우 대만은 WHA에 참석할 명분을 잃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