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76) 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성추행과 명예훼손에 대한 민사소송을 벌여 승소,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낸 여성 칼럼니스트 E. 진 캐럴(79)이 뉴욕 법정에 입고 나온 옷들이 ‘법정 승리 패션(Wear to Win)’으로 화제를 낳고 있다.
뉴욕남부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지난 9일 트럼프가 1996년 무렵 캐럴을 성추행한 일, 그리고 캐럴의 폭로를 거짓말로 치부한 2022년의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 총 500만달러(약 66억원)를 지급하라고 평결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반세기간 40여 명의 여성에 대한 성 비위 논란을 일으켰지만 민형사상 법적 판단이 나온 것은 처음으로, 캐럴이 미투(me too·성폭력 고발) 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캐럴은 지난 4월 말부터 2주간 공판에 총 8회 출석했는데, 그때마다 당당한 미소와 걸음걸이, 특히 보수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우아한 패션으로 화제가 됐다. 첫날 칼라를 빳빳이 세운 흰 셔츠에 갈색 셔츠드레스와 연회색 코트, 둘째 날엔 역시 목까지 단추를 채운 흰 셔츠에 남색 투피스, 셋째 날엔 갈색 터틀넥과 치마에 크림색 재킷을 입고 그 위에 갈색 가죽 벨트를 둘러맸다. 또 크림색 트위드 투피스, 남색 코트, 검은 치마에 흰 자수 재킷 등이 차례로 등장했으며, ‘승리의 날’인 평결 당일엔 크림색 주름치마에 밤색 벨트 재킷을 입었다.
캐럴이 그간 몸에 걸친 옷 색깔은 통틀어 5~6가지 정도로 제한됐고, 옷을 두세 번씩 돌려입는 등 전체적 스타일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또 갈색 서류 가방에 선글라스, 작은 진주 귀고리, 메리제인 통굽 구두 등으로 소품도 최소화했다. 의류 브랜드는 로고 등이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정치 거물에 맞서 싸우는 자신의 진술에만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을 담은 ‘전투 복장’이란 평가와 함께, 캐럴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침묵해 온 모든 여성을 대신해 나섰다”고 한 만큼 여성성도 과감히 드러냈다는 말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 패션 전문 기자 바네사 프리드먼은 12일 “캐럴의 패션은 트럼프 측의 ‘사기꾼·거짓말쟁이’ ‘정신 오락가락하는 할망구’ ‘돈과 명예에 눈먼 피해 호소인’ 같은 공격에 맞서 중립성과 침착함, 평정심을 강조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것 같다”며 “27년 전 성폭력에 대한 목격자나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본인의 일관된 진술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배심원단을 설득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상 성폭력은 피해자의 몸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법적 논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당사자가 어떤 옷차림과 태도로 등장하는지도 여론과 배심원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이다. 여성이 허술한 태도를 보였다든가 야한 옷을 입었는지 같은 ‘행실’이나, 예쁘고 젊은지 등 ‘외모’를 기준으로 가해자의 죄질을 가늠했던 과거 관행이 아직 여전한데, 캐럴이 각종 편견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패션기자 레이철 타시지안도 10일 캐럴은 20세기 화이트칼라 직군에 본격 진출한 1세대 여성으로서, 여성이 외모로만 평가받는 것에 반대하면서도 패션이 신뢰감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이번에도 그 공식을 잘 활용했다고 평가했다. 타시지안은 “캐럴의 패션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지성, 여성의 품격을 담았고, 피해자의 나약함은 없었다”며 “매일 법정에 나오는 그의 옷에서부터 승리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성폭력 피해를 공개해야 하는) 최악의 날에도 멋진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삶의 탈출 밸브가 있음을 일깨워 줬다”고 했다.
캐럴은 1990년대부터 패션 잡지 엘르 등에서 여성 패션부터 직장 생활 처세와 연애·가족 관계 등 고민 상담 코너를 운영한 유명 칼럼니스트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10일 CNN에 나와 또다시 “내가 생판 모르는 여자가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한데 대해 11일 “세 번째 (명예훼손) 제소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