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로맨스 소설, 일명 ‘할리퀸 문고’를 읽는 남성들이 미국에서 크게 늘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19세기 영국에서 꽃피운 로맨스 소설은 이성 간 연애를 주로 여성의 시각과 취향에서 세밀하게 탐구하고, 사랑이 결실을 맺는 해피엔딩이 많다. 여성이 이상적으로 보는 남성상과 남녀 관계가 아름답고 자극적인 문장으로 펼쳐져 ‘여성용 포르노’로도 불린다.
최근 MLB(미 프로야구) 수퍼스타인 브라이스 하퍼(31)가 로맨스 소설 읽기가 취미라고 밝힌 게 화제가 됐다. 그는 지난달 남성 잡지 GQ스포츠 인터뷰에서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망설이다 “엘 케네디 소설을 읽는다”면서 책 제목을 두세 권 댔다. 엘 케네디는 미 로맨스 소설의 최신 주자로, 로맨스에 서스펜스를 더해 인기를 끄는 작가다. 하퍼는 “밤에 케네디 책을 읽으며 긴장을 푼다. 내가 몸담은 (거친 스포츠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에 여성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고, “사실 나도 그 책 읽는다”는 남성들 고백도 이어졌다. 앞서 USC 대학 남자 아이스하키팀 선수들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동영상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난해 미국로맨스작가연합에 따르면 로맨스 소설 독자 중 18%가 남성으로 파악됐다. WSJ은 “출판계 인사들은 남성 비율을 그보다 훨씬 높은 30%대로 본다”고 전했다.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등 로맨스 소설 오디오북 구매자 3명 중 1명은 남성이란 통계도 있다. 미국에선 2018~2022년 새 로맨스 소설 종이책 판매량이 2배 늘었는데, 기존에 희박했던 남성 독자가 더 크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기존 남녀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는 추세를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로맨스 소설은 관계와 감정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 여성의 불안과 고뇌, 소통이 주는 충만함 등을 그리는데, 남성들도 이런 장르에서 정서적 위안을 느끼고,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배울 수 있어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이런 소설에선 남성들이 대개 유능하고 멋있게 묘사되는 데다, 강한 남성이 약점을 보일 때 여성이 더 사랑을 느끼는 줄거리가 많다. 남성 독자가 늘자, 과거 여성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냈던 남성 작가들도 본명을 쓰며 커밍아웃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