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로 100세를 맞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가 25일 워싱턴포스트에 아버지의 건강 비결을 공개했다. (※키신저의 아들은 장수 비결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의사가 아니며, 현재 TV 프로그램 제작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헨리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인 1969~1975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고, 1973~1977년에는 일정 기간 국무장관도 겸직했다. 키신저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한 뒤에도 2권의 책을 썼고 현재 3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또 뉴욕과 런던, 자신의 고향인 독일 퓌르트로 이어지는 100세 생일 기념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1971년 7월 9일 미-중 간의 수교를 위한 비밀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들은 “아버지가 성인이 된 이래 계속 따랐던 ‘건강 요법’을 고려하면, 그의 장수는 특히 기적”이라고 평했다. 아버지 키신저의 주식(主食)은 돼지고기로 만든 독일 소시지 브라트루르스트, 오스트리아의 송아지 고기 커틀릿 요리인 비너 슈니첼이었고, 평생 가혹하게 긴장감 넘치는 의사 결정을 해야 했고, 스포츠는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관객으로만 즐겼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헨리 키신저가 여전히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유지할 수 있는 원인으로, 아들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curiosity)과 사명감(sence of mission)을 꼽았다. 아버지의 정신은 항상 그 시대의 실존적 위기를 짚어내서 해결하려고 씨름하는 ‘열 추적 무기’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키신저는 95세가 된 무렵부터는 인공지능(AI)의 철학적ㆍ실제적 영향에 집착했다. 최근 수년간의 추수감사절 가족 만찬에선, 아버지는 이 신기술의 파장을 고민하면서 손자들에게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대사를 상기시키곤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마치 MIT 대학원생과 같은 강렬함으로 AI의 기술적 측면에 몰입했고, 이의 사용에 대한 토론에 자신의 독특한 철학적ㆍ역사적 영감을 혼합했다”고 밝혔다.

아들은 아버지의 또 다른 장수 비결로 ‘사명감’을 꼽았다. 사람들은 그를 ‘냉혹한 현실주의자’로 희화(戱畵)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는 결코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기억하는 아버지 키신저는 애국주의, 충성심, 초(超)당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정파에 관계없이 우정을 나눴다는 것이다.

아들은 “소련과의 냉전이 한창일 때에도, 당시 주미(駐美) 소련 대사였던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를 협상하는 중간 중간에 체스 게임을 했다”며 “아버지는 소련 정권의 억압적 성격에 대해선 조금도 환상이 없었지만, 이렇게 정기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충돌 위기에 있는 듯한 두 수퍼파워 간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봤다”고 밝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외교는 결코 게임이 아니었고, 나치 독일에서 겪었던 참혹한 경험과 신념에서 외교를 했다”고 주장했다. 헨리 키신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13명의 가족과 많은 친구를 잃었다. 2차 대전에 미군으로 독일 해방에 참전했고, 인류가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아들은 “어느 아들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지만, 일관된 원칙과 역사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토대로 국정 운영(statecraft)을 하려고 한 아버지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썼다.

키신저만큼 미국 현대 외교에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2015년 미국의 외교 잡지인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미국 정치학자들을 상대로 ‘지난 50년간 가장 뛰어난 국무장관’을 선정한 조사에서 키신저는 2위인 제임스 베이커(17.7%), 3위 매들린 올브라이트(8.70%)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압도적 1위(32.21%)였다. 그는 1973~1974년 카이로와 예루살렘 등 중동의 수도들을 오가는 ‘왕복 외교(shuttle diplomacy)’를 하며,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이스라엘ㆍ이집트 간 평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러나 그만큼 논란의 대상이 됐다. 반대파는 키신저가 세력 균형에 기초한 현실주의 외교를 주창하면서 많은 나라의 인권 유린을 초래했다며, 그를 ‘전범(war criminal)’이라고 부른다. 키신저는 동(東)티모르 독립을 막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진압도 묵인했고, 칠레의 첫 사회주의 대통령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과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대통령에 대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박정희 정부가 1971년에 있었던 미 7사단 병력의 철수 이후 1975년 캐나다에서 원자로 2기, 프랑스에서 사용후연료를 재처리할 핵시설을 구입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 계획에 나서려는 것을 알고, 이를 강력하게 막아낸 것도 키신저였다.

지난 7일 키신저는 과거 미국 ABC 방송의 유명한 뉴스프로그램 ‘나이트라인(Nightline)의 테트 코펠(83)과 CBS 방송 인터뷰를 했다. 그는 베트콩과 월맹군의 후방을 공격하려고 캄보디아를 폭격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시 자신이 취했던 입장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코펠은 “방송국에는,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당신의 범죄(criminality) 때문에, 이 인터뷰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키신저는 “그건 그들의 무식을 반영한 거요”라고 대꾸했다. “그건 그렇게 고안되지도, 그렇게 집행되지도 않았소.”

코펠이 “(베트콩을) 차단하려고 당신과 닉슨이 캄보디아 공습을 생각한 것은 분명한데요”라고 묻자, 키신저는 “이봐요. 우리는 역대 어느 행정부든지 우리와 싸우는 게릴라들을 드론과 각종 무기로 폭격했소”라고 맞받았다.

이달 초 자신의 100세 생일을 앞두고, 테드 코펠과 인터뷰하는 키신저/CBS 방송 스크린샷

코펠은 집요했다. “캄보디아 공습 결과는 특히나…” 키신저는 “지금 내가 100세 됐다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당신은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건 필요한 조치였소. 지금 젊은 세대는 감정적이 될 때 생각하지를 않소. 만약 생각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오.”

1974년 여름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에, 젊은 테드 코펠은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외교 정책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조종된다고 생각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키신저는 “사임하겠소.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외교정책은 미국인의 지속적인 가치를 반영해야 하며, 정파적 정책의 주제가 돼서는 안 됩니다”고 말했다.

100세 키신저는 80세(바이든)나 76세(트럼프)의 나이에 미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대통령 직은 일정한 육체적 능력을 필요로 하오. 원숙함(maturity)에는 장점이 있지만, 쉽게 피로하고 일할 능력이 제한된다는 약점이 있어요.”

“키신저 박사의 전화라고 하면,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전화를 받을까요?” 코펠이 물었다. “그가 내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크죠. 예스”라고 했다. 푸틴은? “아마도 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