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수교와 베트남전 종전 등 1970년대 세계 안보 지형을 바꿔놓은 격변 당시 미국 외교를 진두지휘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27일로 100세 생일을 맞았다.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등 그가 현직에서 보좌했던 대통령 2명뿐 아니라 후임 국무장관 14명 중 8명이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강연·저술·인터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두 권의 책을 쓴 뒤 최근 세 번째 저서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빌더버그 국제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키신저 전 장관은 100세 기념행사를 위해 뉴욕, 런던과 고향인 독일 퓌르트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7일(현지 시각) 100세 생일을 맞았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일 키신저 전 장관이 워싱턴DC 미국 국무부 점심 만찬에 참석한 모습. /AFP 연합뉴스

이처럼 세계 정세에 대한 조언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건강 비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가 아버지의 장수 비결로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을 꼽았다.

TV 제작사 대표로 일하는 데이비드는 25일(현지 시각) ‘100세가 된 아버지, 헨리 키신저의 장수 지침서’라는 제목으로 워싱턴포스트에 쓴 기고문에서 키신저 전 장관의 일화를 소개했다.

아들이 소개한 키신저 전 장관의 일상생활은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식단은 돼지고기로 만든 독일 소시지 브라트루르스트, 오스트리아의 송아지 고기 커틀릿 요리인 비너 슈니첼 등 고열량 음식들로 채워졌다.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업적 특성을 감안하면 정신적 스트레스에 상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열성적인 스포츠팬이지만 직접 경기에 참여하며 땀을 흘리는 게 아닌 관중으로 시청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100세가 되도록 지속적인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 데이비드는 “지치지 않는 호기심(unquenchable curiosity)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데이비드는 “20대 후반이었던 1950년대 아버지 주요 고민은 핵무기의 부상과 인류에 대한 위협에 대한 것이었고, 5년 전인 95세를 맞은 키신저 전 장관은 인공지능(AI) 문제를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고령(高齡)에도 새로운 분야를 계속 접하고 연구하면서 활동성을 유지한 것이 그의 장수 비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들은 “최근 수년간의 추수감사절 가족 만찬에서 아버지는 이 ‘새로운 기술’의 파장을 고민하면서 손자들에게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대사를 상기시키곤 했다”며 “아버지는 마치 MIT 대학원생과 같은 강렬함으로 AI의 기술적 측면에 몰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90대 때에도 지칠 줄 모르는 활동적인 상태를 유지했고, 전염병(코로나 팬데믹)조차도 아버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데이비드가 아버지의 또 다른 장수 비결로 꼽은 것은 ‘사명감(sense of mission)’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애국주의나 충성심, 초당파주의와 같은 (근본적) 가치들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뛰어난 두뇌와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써가며 나라에 봉사해왔다”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러면서 미·소 간 냉전의 긴장이 한창이었을 때도 당시 주미 소련 대사였던 아나톨리 도브리닌과 가깝게 지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도브리닌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체스 게임을 했다”며 “아버지는 (적과도) 정기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충돌 위기에 있는 두 수퍼파워(미·소) 간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봤다”고 전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외교는 결코 게임이 아니었다”며 “아버지는 나치 독일에서 겪었던 참혹한 경험과 신념을 바탕으로 외교를 했다”고 했다. 1923년 독일 바이에른 미텔프랑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키신저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13명의 가족과 수많은 친구를 잃었다. 나치를 피해 가족과 1938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1969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고, 1973~1977년 56대 국무장관을 지냈다.

1949년 앤 프레셔와 결혼해 장녀 엘리자베스와 데이비드 등 1남 1녀를 뒀다. 1964년 이혼한 뒤 10년 뒤인 1974년 낸시 매긴스와 재혼했다. 아들은 “어느 아들도 아버지의 유산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면서도 “일관된 원칙과 역사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토대로 국정 운영(statecraft)을 하려고 한 아버지의 노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