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미국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흑인 유권자들의 ‘표심’이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백인 유권자 비율이 계속 줄어들며 유색 인종의 중요성이 정치권에서 점점 더 부각되는 가운데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흑인이 선거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승패를 가를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흑인 지지율이 높은 민주당은 ‘집토끼’ 굳히기에 나섰고, 백인 지지층이 많은 공화당은 흑인 투표율 끌어내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8일 나온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내년 11월 있을 미 선거에서 인종 문제가 큰 변수가 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이날 연방 대법원은 미 동남부 앨라배마주가 흑인 유권자에게 선거구를 불리하게 짰다며, 이를 개편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앨라배마주는 흑인 비율이 27%로 매우 높은 편인데 지난 총선 때는 7개 흑인 밀집 거주 지역은 선거구 중 1개에만 몰리도록 선거구가 획정됐다. 결국 하원 의원 선거 결과 7개 지역구 중 6개는 백인이, 한 곳만 흑인이 당선됐다. 흑인 민권 단체는 공화당이 장악한 주(州)정부 및 의회가 흑인을 한 선거구에 고의적으로 몰아 선거를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흑인 비중을 감안하면 (흑인들이 지지한) 민주당이 최소 2석은 돼야 한다”며 소송을 걸었다.
형식상으로는 행정소송이었지만, 흑인 유권자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민주당·진보 진영과, 백인 유권자 우위를 이어가려는 공화당·보수 진영의 정치 대결이었다. 앨라배마는 주지사와 연방상원(2명) 전원, 연방하원 7명 중 6명이 공화당 소속인 공화당 초강세 지역이다. 이 소송이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넘어가면서 낙태·동성 결혼 못지않은 전국적 관심사가 됐다.
보수 6 대 진보 3으로 보수 쪽에 기울어진 대법원의 이념 지형상 앨라배마주 정부가 승소(현행 선거구 타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대법원은 예상을 깨고 흑인 유권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에 온건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임명된 브렛 캐버노 대법관이 현행 선거구 시스템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이들은 흑인 유권자에게 불리한 현행 선거구 획정이 선거 절차에서 피부색이나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투표권법 2조를 위반했다고 보았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내년 대선 및 연방 하원 선거에선 흑인 등 인종별 유권자 분포에 맞춰 선거구가 책정될 전망이다. 이번 판결은 대통령 선거나 연방 상원 선거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각종 선거에서 흑인 표심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투표의 자유를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는 환영 성명을 냈다.
한편에선 인종 분포까지 고려해 선거구를 확정해야 할 경우, 내년 선거판이 과도한 ‘인종 전쟁’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의외의 결론이 난 이날 대법원 판결은 흑인을 비롯한 인종 문제가 앞으로 선거에서 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미국 인구 중 백인 비율은 2000년 69%, 2010년 64%에서 지난해 59%로 계속 줄어, 정치판에선 유색 인종의 ‘입김’이 점점 세지는 상황이다. 히스패닉계의 증가율이 가장 빠르지만 (유색인종 중엔) 여전히 흑인의 비율(14%)이 가장 높다.
2020년 대선에서 흑인층 ‘몰표’를 받았던 바이든은 최근 흑인층 지지율이 내려갈 조짐을 보이자 ‘흑심(黑心·흑인 표심)’ 잡아두기에 매진하고 있다. 국방장관(로이드 오스틴), 유엔 주재 대사(린다 토머스그린필드), 백악관 대변인(커린 잔피에어), 차기 합참의장(찰스 브라운) 등 흑인을 요직에 대폭 기용했다. 임기 중 임명한 첫 대법관도 ‘첫 흑인 여성’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커탄지 브라운 잭슨이었다. 지난 50여 년간 중서부 아이오와주에서 대선 경선 첫 테이프를 끊었던 전통도 버리고, 지난 2월 연 2024년 첫 경선지를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바꿨다.
한편 민주당의 적나라한 흑인 공략이 역풍으로 이어져 내년 선거에서 보수·백인 표심의 결집을 가속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20년 대선에서 낙선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 주장을 계기로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주들은 유권자 사전 등록, 신분증 확인 투표 절차를 까다롭게 바꾸는 중이다. 투표 절차 강화 조치는 저소득·저학력자 비율이 높은 흑인 투표층의 선거 외면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소리(VOA)는 “공화당이 우세한 최소 11주가 투표 절차를 까다롭게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