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JP모건)가 12일 조직적 미성년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연루된 사건 피해자들에게 2억9000만달러(약 3741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억만장자 투자자였던 엡스타인은 성범죄 등 혐의로 뉴욕 맨해튼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2019년 세상을 떴지만 연루자들에 대한 수사와 단죄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JP모건이 지급하기로 한 금액은 미국의 성범죄 관련 민간 합의금으론 사상 최대 규모다.
1980~2013년 엡스타인의 주거래은행이었던 JP모건은 엡스타인에게 성 착취를 당한 익명 피해자들이 지난해 11월 이 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거액을 지급하기로 했다. JP모건은 엡스타인이 생전 성 노예처럼 부리던 10대 소녀들에게 비용 등을 지급한 정황이 있는 수상한 이체 내역이 다수 감지됐음에도 이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들에게 고소당했다. 뉴욕타임스는 “많게는 피해자 100여 명에게 합의금이 지급될 수 있다”고 전했다. 뉴욕 연방법원 제드 레이코프 판사는 이 사건의 위중함을 감안해 지난 3개월간 10여 명에게 연속 증언 청취를 하는 등 패스트트랙(신속 처리)으로 소송을 진행해 왔다.
미 사법 당국과 시민 단체, 언론 등은 엡스타인 사후 4년째인 지금까지도 범죄 연루자 처단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엡스타인의 또 다른 주거래은행이었던 도이체방크는 피해자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 대해 7500만달러(약 967억원)를 지급하기로 지난달 합의했다. 이와 별도로 엡스타인이 미성년 여성을 불러 성 착취 파티를 벌인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정부는 자국에서 사실상 인신매매가 일어나는 데 공조했다며 JP모건을 고소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엡스타인과 어울렸거나 그의 후원을 받은 인사들 명단은 지금까지도 계속 드러나면서 책임 추궁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에선 범죄 용의자가 극단적 선택 등으로 세상을 뜨면 죄를 덮거나, 심지어 미화하는 일도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피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자 지지자들이 그를 옹호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2차 가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선 이런 행위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진실을 은폐해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수사·사법 당국은 자살을 정당한 단죄를 지연시키는 일종의 사법 방해로 간주해 주변인 조사에 더 박차를 가해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에게 사죄할 사람을 최대한 더 끌어내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 최악의 폰지(금융 다단계) 사기를 저지른 버나드 메이도프는 2021년 교도소에서 사망했는데, 검찰은 그의 자산을 추적해 사기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아직도 진행하고 있다.
JP모건과 관련해서는, 피해자들이 이 은행이 엡스타인의 성범죄 사실을 알고도 ‘큰손 고객’이었던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좌를 계속 유지해 주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뉴욕타임스가 입수해 공개한 JP모건 직원들의 법원 증언에 따르면 은행 직원들은 엡스타인 계좌에서 거액의 수상한 이체가 반복적으로 이뤄지자 은행 감사팀에 ‘의심 거래’로 신고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피해자들은 이 돈이 궁극적으론 성 착취를 당한 미성년 여성들에게 지급됐다고 보고 있다.
JP모건의 고위 임원(제임스 스탤리)이 엡스타인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고, 이메일로 어린 소녀들의 야한 사진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면서 JP모건은 더 궁지에 몰렸다. 그가 엡스타인의 성 착취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한 성범죄 정황을 유추할 수는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아울러 엡스타인이 이미 2008년에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13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음에도 JP모건이 그와 금융 거래를 끊지 않아 범죄를 사실상 방조했다고 주장했다.
JP모건은 소송 이후 줄곧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인지하지 못했고, 스탤리와 엡스타인의 관계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반박해 왔다. 하지만 직원들의 증언과 드러난 증거가 JP모건에 점점 불리해지는 한편, 법원이 CEO인 제이미 다이먼의 증언 청취까지 하며 “다이먼이 엡스타인의 성범죄를 방조했다”는 방향으로 수사가 죄여오자 JP모건은 결국 거액 합의금을 지급하고 소송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엡스타인과 연루돼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합의금을 지급한 유명 인사와 기업 명단은 앞으로도 늘어날 조짐이다. 지금까지 엡스타인과 친분이 드러나 망신당한 유명인만 해도 기업인·왕족·학자·금융인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이자 자선 단체 큰손인 빌 게이츠는 엡스타인 사망 직후 그와 어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내 멀린다에게 2021년 ‘세기의 이혼’을 당했다. 게이츠는 “엡스타인과의 만남은 실수였고, 깊이 후회한다”고 사과 성명을 냈다. 최근엔 게이츠가 과거 20대 러시아 여성과 불륜 관계를 맺은 것을 엡스타인에게 약점 잡혀 협박당한 사실도 알려졌다.
미술·금융계 거물인 리언 블랙 뉴욕 현대미술관(MoMA) 전 이사회 의장은 2021년 ‘미술계의 왕좌’라는 MoMA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자신이 세운 500조원 규모 투자사인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CEO직에서도 사임했다. 엡스타인에게 5년간 수억 달러를 송금했는데, ‘마당발’인 엡스타인에게 기대 유력 정치인 등에게 뇌물을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기 때문이다.
뉴욕대 중퇴 학력인 엡스타인이 명문대에 집중적으로 기부하고 유명 학자들과 교류하는 데 집착한 결과, 학계도 유탄을 맞고 있다. 하버드대는 엡스타인의 기부금 650만달러(약 82억원)를 받은 ‘진화 역학’ 연구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이를 운영했던 마틴 노웍 수학과 교수를 해임했다. 앨런 더쇼비츠 전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는 2008년 엡스타인의 성범죄 관련 첫 기소 때 변호를 맡아 ‘특혜성 형량’을 받게 해주고 성 접대도 받은 의혹으로 학교에서 퇴출당했다.
미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은 엡스타인이 성범죄자로 공식 등록되고 나서도 아내의 재단에 1억원대 후원금을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드러나자 “바보 같은 짓이었다”며 공개 사과했다. 세계적 언어학자이자 진보 학계 대부인 놈 촘스키 MIT 명예교수, 리언 보츠타인 뉴욕 바드대 총장도 엡스타인에게 돈 받고 어울렸다는 사실이 지난달 드러났다.
이 말고도 윌리엄 번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 빌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등도 엡스타인과 얽혔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엡스타인 저택에 드나든 증거가 나와 버진아일랜드 검찰의 출석 요구서를 지난달 받았다. 영국 앤드루 왕자는 “엡스타인 소개로 17세 때 강제 성관계를 맺었다”는 피해자에게 2019년 고소당하고도 버티다가, 맨해튼 검찰·법원의 끈질긴 소환 요구에 3년 만인 지난해 1200만파운드(약 191억원)를 피해자에게 합의금으로 주고 공식 사과문을 내고서야 소가 취하됐다. 그는 소송 중 왕실의 모든 직무에서 사퇴했다.